기획 특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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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특집> 한말 의병 전쟁과 전남의병(1)<역사 특집> 한말 의병 전쟁과 전남의병(1) 박해현 문학박사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 상실 위기에 우리 민족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1895년 단발령으로부터 촉발된 의병 항전은 1905년 다시 불붙어 1907년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전남 곳곳에서 일본군 정규군을 맞아 전남 의병들은 한치의 물러섬 없이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400여 회 가까운 전투가 행해졌다. 이러한 의병들의 빛나는 전투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늦추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것도 광복절을 맞아 의미가 있다 하겠다. 1. 의병 활동의 개념 조국의 제단에 목숨을 던진 의병들의 활동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필요하다. ‘의병 운동’ ‘의병 전쟁’ ‘의병 투쟁’ ‘의병 항쟁’ 등 다양한 용어들이 편의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의병 운동이나 의병 전쟁이 지닌 개념상의 혼란을 피해 ‘운동’이나 ‘전쟁’ 대신에 ‘전기 의병’ ‘후기 의병’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은 의병 항쟁이 기본적으로 ‘반침략·반개화·근왕주의’(勤王主義)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운동의 지향점이 크게 달라진 것도 중요한 이유다. ‘의병 운동’은 한말 의병 연구자들이 일찍부터 사용해오던 일반화된 용어다. ‘의병 운동’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후 노골화되는 일본의 침략 정책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의 장기간 반침략 운동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면, 러·일전쟁 발발이후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서는 ‘항일독립전쟁’을 ‘의병 운동’이라 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받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의병 스스로 ‘독립군’을 표방하였던 독립전쟁이다. ‘의병 전쟁’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2. ‘한말 의병 전쟁사’의 시기 구분 서세동점으로 표현되는 19세기 후반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직면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힘겹게 막았지만,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유발함으로써 동아시아 역학관계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조선은 외세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사회를 변혁해야 할 이중의 과제에 직면한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은커녕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를 틈타 경복궁을 점령(갑오왜변)하고,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본은 친일 정권을 내세워 단발령을 반포하는 등 전통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에 맞서 시작된 의병 전쟁이 1919년 3·1 운동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전개된 의병 전쟁은 시대 상황 및 항쟁 주체에 따라 성격에 차이가 나타났다. 의병 전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기 구분이 필요하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을미 의병’ ‘을사 의병’ ‘정미 의병’ 등 간지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이 기준은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가령 ‘을미 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충북 보은에서 일어난 문석봉의 의병 봉기를 기점으로 설정한 개념이다. 본격적으로 의병 운동이 전개된 것은 단발령 직후인 1896년 정유년이다. 그리고 1894년 갑오왜변 때 경북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의병봉기의 시작, 전개 과정 등을 정확히 표현하는 역사 용어로 ‘을미 의병’은 적절치 않음이 드러났다. ‘을사 의병’ 또한 지칭하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다. ‘을사 의병’은 을사년인 1905년에 봉기한 의병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1906년 병오년에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과 고광순을 ‘을사 의병’에 포함하는 등 ‘병오 의병’과 별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병오 의병’을 ‘을사 의병’으로 호칭하거나, 1904년 갑진년에 봉기한 의병도 ‘을사 의병’으로 분류하는 등 혼란이 따르고 있다. ‘정미 의병’은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일어난 의병 전쟁을 총괄하는 용어다. ‘을사 의병’과 ‘병오의병’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경우와는 달리 ‘무신 의병’(1908)과 ‘기유 의병’(1909)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은 채 ‘정미 의병’에 포함한다. 간지를 기준으로 의병 전쟁의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이러한 한계를 ‘전기 의병’(갑오·을미의 병 1894~95), ‘중기 의병’(을사 의병 1905), ‘후기 의병’(정미 의병 1907), ‘전환기 의병’(1910~1919)으로 구분하여 극복하기도 한다. 1894년 갑오 왜변부터 1896년까지 계속된 일제의 침략 정책에 저항하는 의병을 ‘전기 의병’,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이후 1905년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국권을 빼앗기는 상황을 전후하여 일어난 의병을 ‘중기 의병’,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며, 우리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상황에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일어나 일제와 치열한 ‘독립 전쟁’을 치렀던 의병을 ‘후기 의병’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의병 전쟁은 1910년 8월 국권 피탈 이후에도 기세가 꺾였다고 하더라도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 때까지 계속되어 무장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이를 ‘전환기 의병’으로 성격을 지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전기, 중기, 후기 등 시간을 가지고 나눈 경우에도 남겨진 문제가 적지 않다. 전기와 중기 사이의 단절과 중기와 후기의 연속성이 잘 드러나지 않아 의병운동의 시간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갑오왜변을 빌미로 한 일본의 내정간섭과 개화정책에 대한 반대가 의병봉기의 명분이 된 전기 의병과 러·일 전쟁으로부터 을사늑약에 이어지는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과 국권회복이 의병봉기의 명분이 된 중기 의병은 그 시기 및 성격이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 반면 중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추진한 식민지화 과정의 연장선에 있다.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의병전쟁의 지향점이 달라지거나 중단된 적도 없어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의병전쟁의 주체 측면에서도 전기 의병이 주로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주도한 것에 비해 중기 의병에 있어서는 평민출신 의병장이 등장한다. 또한, 후기 의병에는 해산군인이 의병에 가담하는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중기 의병은 강제로 해산되거나 체포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후기 의병으로 이어져 항쟁을 계속한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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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만평>17호, 장백산 화백<남악 만평>17호, 장백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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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특집> 밤의 제왕 수리 부엉이▢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 조기석 (사)한국멸종위기야생생물보호협회무안지회장 사냥한 먹이를 둥지에 저장하여 “부자새”라 부르기도 번식기간 내내 교미 활동 지속으로 일부일처제 유지 분류 척추동물 > 조강 > 올빼미목 > 올빼미과 학명 Bubo bubo kiautschensis 천연기념물 제324-2호, 멸종위기 야생생물Ⅱ급, 국가적색목록 취약(VU) 수리부엉이는 올빼미목 올빼미과에 속하는 대형 맹금류이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넓게 서식하고 있다. 학명은 ‘Bubo bubo kiautschensis’이다. 전체 몸 색깔은 황갈색에 갈색의 얼룩무늬가 있고, 배쪽이 더 밝다. 수리부엉이라는 이름은 대형 맹금류인 수리와 같이 크고 매서운 부엉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암컷의 몸길이는 75cm 정도이며 날개를 펴면 그 너비가 180cm에 달한다. 몸무게는 1.5~3kg이다. 머리 위에 있는 2개의 귀 모양의 깃털인 우각(羽角)이 크고 주황색인 눈이 특징적이다. 다리와 발가락 끝까지 깃털이 나 있다. 바위가 많은 장소나 속이 빈 나무에서 휴식과 번식을 한다. 해질녘에 가지에 앉아서 세력권 내에 있는 설치류, 산토끼, 토끼, 대형조류 등을 찾아 사냥한다. 사냥을 마치면 그것을 둥지 안에 저장해 두기도 하여 “부자새” 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야행성이며 조용히 비행하는 습성이 있다. 커다란 몸집을 가진 수리부엉이가 숲속 밤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수리부엉이의 신체구조에 있다. 수리부엉이는 야간사냥에 적합하도록 몸의 구조가 발달 되었다. 몸 구조 중 특이한 점은 첫째, 눈동자를 움직이는 대신 부드럽게 돌아가는 목뼈로 고개를 무려 270도까지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모든 방향을 살펴볼 수 있다. 둘쪄 수리부엉이에게는 동물의 귀처럼 생긴 깃이 있는데, 이것은 귀가 아니라 ‘귀깃’이라 한다. 귀깃은 귀와 같은 역할을 해서 주위의 소리를 잘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수리부엉이의 청력은 소리에 민감한 고양이보다 4배나 높다고 한다. 이 귀깃을 이용해 깜깜한 밤에도 움직이는 동물의 소리와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세째 수리부엉이의 눈은 맹금류답게 매우 발달 되어 있고 특히 밤에는 더 잘 보인다. 주황빛을 띠는 노란색의 눈은 수리부엉이의 발광기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달빛, 별빛을 모아 밖으로 반사하는 반사경과 같은 작용을 한다. 야간 투시경이 장착되어있는 것처럼 눈으로 정확하게 먹이까지의 거리도 계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새들과는 달리 수리부엉이의 깃털은 아주 풍성하다는 것이다. 풍성한 깃털은 수리부엉이에게 두 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풍성한 깃털로 한겨울에도 번식할 수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날개깃의 가장자리가 빗살모양으로 되어 있어 날 때 소리를 내는 소용돌이 발생이 억제되어 소리 없이 은밀하게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날개를 펄럭여도 소리가 나지 않아 사냥할때 먹잇감 가까이 날아가도 상대방은 수리부엉이가 오는지도 모른 채 사냥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둥지는 보통은 절벽 바위틈에 틀지만, 도심지 인근에서는 대형창고나 아파트 단지에서도 번식을 한다. 수리부엉이는 다른 텃새류와 달리 11월부터 번식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짝짓기를 위한 구애의 울음소리는 늦겨울 바위산이나 암벽 등에서 들을 수 있다. 산란은 보통 1월부터 3월까지 계속되며, 새끼들의 부화 시기는 2월부터 4월까지이다. 알을 품는 것은 전적으로 암컷이 담당하며, 수컷은 일을 품고 있는 동안 암컷에게 먹이를 공급해준다. 수컷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둥지에서 2km가량 떨어진 곳까지 사냥을 나가기도 한다. 수리부엉이는 다른 종들에 비해 번식에 소요 되는 시간이 상당히 긴 편에 속한다. 이렇게 긴 번식기동안 암컷과 수컷은 지속적으로 교미행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번식기 동안 전적으로 수컷에게 먹이를 공급받아야 하고, 이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번식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암수 모두 새끼를 안정적으로 부양하기 위한 신뢰 쌓기 행동의 하나로 번식 기간 내내 교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부화한 새끼들은 보통 4월에 대부분 둥지를 떠나는데 부화한 후 솜털로 덮여 있던 몸이 부모와 같은 억센 털로 바뀌기 시작하면 번식 둥지를 벗어나 주변의 산림에서 8월에서 9월까지 약 4~5개월간 생활하며 먹이활동, 비행 등을 어미로부터 배워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 3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멸종위기생물2급으로 분류된다. 국가적색목록에 취약(VU)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다. 가끔은 양계장 등지에 갑자기 나타나 신문지상에 소개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무안 해제 발산양계장에 출현한 수리부엉이로 홍역을 치루었다. 발산양계장은 계란을 생산하는 산란계농장인데 계사 안으로 수리부엉이가 들어가 이리 날고 저리 날아다녀서 닭들이 놀라고, 놀란 닭들은 정상적인 알을 낳지 않아서, 양계장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것이다. 당시 양계장주인에게서 잡아 주거나, 밖으로 쫓아 달라고 연락이 와 가 보았으나, 큰 계사 안에서 생포하기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다. 겨우 밖으로 보내긴 했으나 이후로도 몇 번 양계장에 더 나타나 소동을 벌였다는 소문이 들렸고, 지금은 해제 봉대산 인근에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곳으로 서식지를 옮겨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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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갤러리> 분청사기, 김문호 도예가<남악갤러리> 16호, 분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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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만평> 16호, 장백산 화백<남악 만평>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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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특집> 마한의 용맹한 표상(表象) 응준(鷹準)(하-2, 完)<역사 특집> 마한의 용맹한 표상(表象) 응준(鷹準)(하-2, 完) 박해현 문학박사, 마한역사연구소장 <지난 14호에 이어> 마한 표상 ‘응준’과 백제 신라의 별칭이 '닭'을 의미하는 '계림'인 것처럼, '응준'의 중심지였던 영산강 유역에도 '매'와 관련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이곳이 '응준'의 핵심 지역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마한 남부 연맹 지역에 해당하는 차령 이남 여러 곳에 '매'와 관련된 기록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고려 충렬왕 원년 '응방(鷹坊)'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그 중심이 나주 장흥부 관할이라고 한 『증보문헌비고』 기록이 주목된다. 응방은 잘 알고 있듯이 원 간섭기에 '해동청(海東靑)'으로 유명한 고려의 '매'를 공물로 바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었다. 그 응방 중심 지역이 나주였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전라도 지리산에 '응준'이 서식하여 매년 공물로 진상을 한다"라고 하여, '매'의 산지로 전라도 지역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지역과 '매'의 관계가 깊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전북 진안 지역에서 '매'를 이용한 꿩 사냥 전통이 남아 있는 것도, 매와 전라도 지역이 전통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매' 곧 '응준'이 마한 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맹금류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편, 『일본서기』에도 백제의 '매'를 이용한 사냥 풍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백제 때의 사실이라고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전라도 지역이 '매' 주생산지이고 마한 남부 연맹의 상징이었다고 하는 사실과 인덕천황 43년(455년) 시기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백제 이야기라기보다는 마한과 관련된 사실을, 후대에 백제의 것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일본서기』 기록은 마한의 매사냥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본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위 기록에 뒤이어 "백제의 풍속에 이 새를 구지(지금의 매를 말한다.)라 하였다(百濟俗號此鳥曰俱知(是今時鷹也)"라고 한 기록이 주목된다. 말하자면 백제에서 매를 '구지'라 했다는 것인데, 이 기록이 마한 시기의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였으므로 마한에서는 '매'를 '구지'라 했음을 알 수 있다. '매'를 '구지'라고 부르는 전통이 16세기 중엽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에 '매'를 '구겨내'라고 적고 있는 데서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매'를 그들의 고유어로 '구지' 또는 '구지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구다라(クダラ)'라고 하는 것을 익히 아는 사실인데, '구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매'를 뜻하는 '굳'에 '나라'라는 의미를 보태면 '구다라'라고 하는 용어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데 매와 관련 있는 곳은 백제가 아니라 마한 지역이었다. 일본 고대문화 성립에 기여한 도래인 대부분이 마한계, 특히 영산강식 토기로 상징되는 영산강 유역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구다라'는 '백제'가 아닌 '마한'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구다라’가 백제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던 것은 마한과 백제와 통합된 이후 마한계가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처럼 마한 지역이 매를 상징으로 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백제가 5방으로 지방 편제를 할 때 남방에 구지하성(久知下城)을 두었다는 중국 北史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전라도 지역에 해당하는 곳을 '구지하성'이라고 한 것은 이 지역이 '응준'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북 김제에 해당하는 금구현도 '구지지산'이라고 하는 등 마한 남부 연맹 여러 곳에 '구지'라는 지명이 많다는 것도 이러한 추론의 방증이 될 것이다. 결국 6세기 무렵까지도 '사슴'으로 상징되는 부여계인 백제 중심의 마한 북부 연맹과 '매'로 상징되는 마한 남부 연맹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들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복암리 1호분 피장자가 그러한 연맹을 대변하고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을 '응준' 녹유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마한을 '용맹하다'라고 기술한 것은 마한 남부 연맹체가 '응준'을 상징으로 하며 중국 중심의 질서에도 동참하지 않고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기술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며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던 막강한 마한 남부 연맹이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한 차례 공격으로 무너질 수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오히려 6세기 무렵까지도 백제와 치열하게 정립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대회전을 앞둔 백제로서는 마한 남부 연맹 세력과 공존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복암리 1호분 세력에게 '응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녹유명문은 이때 주어진 선물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백제 국왕이 복암리 세력에게 사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산강 유역의 '응준' 세력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고, 대신 백제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데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에 마한 남부 연맹을 지칭하는 응준이 나오는 것은, 당시 마한 남부 연맹 계통의 정치 세력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마한 남부 연맹이 백제에 통합될 때 부여계의 백제 왕실과 사실상 대등한 수준으로 통합이 이루어졌고, 내부적으로 치열한 세력 다툼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무왕의 익산천도 및 의자왕 대 처절한 정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는 없을까?.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백제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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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갤러리> 분청사기 14호, 15호 김문호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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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만평>14호, 15호. 장백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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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특집> 여름 장마철 웅덩이나 논에 물이 고이면 나타나는 맹꽁이<생태 특집> 여름 장마철 웅덩이나 논에 물이 고이면 나타나는 맹꽁이 조기석 (사)한국멸종위기야생생물보호협회 무안지회장 ▢ 뒷발로 땅을 잘 파고 들어가 쟁기발개구리라 하기도 ▢ 하루 이틀이면 부화를 하고, 한 달 정도면 올쟁이 시절을 마치는 부지런한 종 ▢ “맹 맹”하고 사람이 소리를 흉내 내어도 “꽁 꽁” 하고 화답을 하는 귀여운 맹꽁이 △ 분류 : 척추동물 > 양서강 > 개구리목 > 맹꽁이과 > 맹꽁이속 △ 학명 : Kaloula borealis △ 등급 : 멸종위기 야생생물Ⅱ급, 국가적색목록 취약(VU) 학명은 kaloula borealis BARBOUR이다. 주둥이는 짧고 작으며 끝이 둥그스럼하며 뾰족하다. 수컷은 뚜렷한 울음주머니가 하나 있으며, 아래 위 턱에 이가 없다. 혀는 타원형이며 돌기가 없다. 눈동자는 검은색으로 타원형이고, 윗눈꺼풀의 가장자리에는 노란색의 가는 줄이 있다. 몸통은 풍선을 불어 놓은 것처럼 부풀어 있고, 등에는 작은 융기가 산재해 있으며, 배는 노란색 계통으로 매끄럽다. 앞다리는 몸길이의 반 정도이고 발가락 끝이 팽대되어 있으며 물갈퀴가 없다, 뒷다리의 길이는 앞다리의 약 2배이며 넓적다리는 극히 짧으며, 물갈퀴는 발달되어 있지 않고, 깊이 패어 있다. 등은 노란색에 약간 청색을 띠는데, 작은 돌기 주위는 검은색이다. 몸통 배면의 옆쪽에는 연한 흑색의 대리석과 같은 모양의 얼룩무늬가 있다. 유생(幼生)은 머리와 몸통이 대체로 둥그런 알 모양이고, 길이는 너비보다 약간 크며 앞쪽은 현저하게 너비가 넓다. 주둥이 끝은 뾰족한 편이며 끝이 잘려있다. 눈은 등쪽 옆면에 있으며, 두 개의 콧구멍은 서로 접하여 있다. 여름철 첫 장마가 와서 논과 길가의 웅덩이에 물이 고이면, 수컷이 먼저 물웅덩이에 들어가 “맹꽁 맹꽁” 요란하게 울면 암컷이 이 소리를 듣고 찾아 들어가 짝을 지어 산란이 시작된다. 산란을 마치면 물속에서 나와 밭둑이나 산기슭으로 이동하여 뒷다리로 굴을 파서 생활 하며, 낮에는 그 속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밤에 나와 활동을 하는 야행성이다. 이러한 형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개구리와 매우 다른 모습이다. 몸통이 찐빵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고, 머리는 작으며, 네발은 매우 짧으나 힘은 강하다. 몸빛과 모양에 의한 암수의 구별은 쉽지 않으나, 번식기에 수컷은 몸빛이 검게 변하고, 울음주머니 때문에 턱이 약간 검은색을 띤다. 암컷의 턱은 얼룩이 뚜렷한 점으로 암수를 구별할 수 있다. 5~8월에 비가 내려 만들어진 물웅덩이에 산란하며, 알은 한 번에 5~15개씩 수십 차례에 걸쳐 마리마다 2,000여개 정도 낳는데, 물 표면에 뗘 있다. 36시간 이내에 알에서 올챙이가 깨어 나온다. 올챙이는 보통 24~ 29일(최대 40일) 만에 새끼 맹꽁이가 되어 땅 위로 기어 올라온다. 겨울에는 땅속이나 돌무더기 틈 속에서 겨울잠을 잔다. 뒷발로 진흙땅을 파서 몸 뒤쪽부터 땅속으로 들어가고 앞쪽에 조그만 구멍만 남겨 놓는다. 이런 이유로 서양에서는 '맹꽁이'를 '쟁기발개구리'라고도 한다. '맹꽁이'라는 이름은 울음소리에서 유래 되었다. 맹꽁이는 개구리와 같은 양서류이다. 양서류는 온도에 아주 민감해서 종류별로 자신에게 맞는 온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각기 다르다. 산개구리들이 가장 부지런해서 이월 혹은 삼월 겨울잠에서 깨어나 차가운 계곡물이나 둠벙, 웅덩이 등에 알을 낳는다. 물이 워낙 저온이다 보니 알에서 올챙이로 부화하는 데도 한 달 가까이 걸린다. 그러니 개구리가 깨어난다고 하는 경칩은 바로 산개구리의 이야기이다. 오월 모내기를 끝낸 후 논에 참개구리와 청개구리들이 울기 시작한다. 그들의 산란기인 것이다. 6월 비가 좀 내리고 웅덩이나 논에 물이 고이면 맹꽁이가 울기 시작한다. 길지도 않다. 딱 2주 정도 아주 시끄럽게 울어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맹꽁이들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야행성이고 땅속에 들어가 생활하다 보니 평소 맹꽁이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로지 장마철 짝짓기 철에 맹꽁맹꽁 웅장한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날이 덥고 물도 따뜻해 알에서 올챙이로 변하는데 하루면 된다. 산개구리에 비해 아주 빠른 성장이다. 가끔은 도심의 개발 현장에서 맹꽁이의 출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기도 한다. 멸종위기 2급 법정 보호종이기 때문이다. 개구리와 맹꽁이는 모두 수컷만 울음소리를 낸다. 산개구리들은 새소리 비슷하게 "호로로로로" 소리를 내고, 참개구리는 울음주머니가 볼 양쪽에 있어 한쪽씩 소리를 내 "개굴 개굴" 처럼 들린다. 청개구리는 울음주머니가 턱밑에 하나라서 "딱 딱 딱" 소리를 낸다. 맹꽁이도 울음주머니가 하나라 "맹 맹 맹" 소리를 낸다. 다른 맹꽁이가 같이 울기 때문에 소리의 차이로 “맹 꽁 맹 꽁” 겹쳐 들리는 것이다. 무안국제공항인근에 맹꽁이 집단 서식지가 있다. 개발로 습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어 매년 그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올해도 곧 장마가 시작되면 그곳에서 그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 가까이 가 있다가 “맹 맹” 하고 그들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면 “꽁 꽁” 하고 대답을 하는 그런 놈들이다. 귀엽다. 그들을 잘 지켜내지 못하는 아쉬움도 더하는 한 해가 또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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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마한의 용맹한 표상(表象) 응준(鷹準)(하-1)<역사>마한의 용맹한 표상(表象) 응준(鷹準)(하-1) 박해현 마한 표상 ‘응준’과 백제 <지난 12호에 이어> 그렇다면 성왕 때 ‘남부여’와 함께 '응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응준이라는 명칭이 『제왕운기』에 '혹 남부여, 혹 응준'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남부여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조법종은 응준이라는 명칭이 '매'를 뜻하기 때문에, 신라를 닭을 뜻하는 '계림', 고구려를 늑대를 뜻하는 '맥·예맥'이라 칭하듯이 백제는 매를 뜻하는 '응준'을 별호라 사용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살폈다. 이러한 해석은 그럴듯하나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백제는 국왕들이 사슴 사냥을 즐겨 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사슴을 주된 ‘희생(犧牲)’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 우연히 출토된 유명한 백제 금동대향로의 맨 윗 봉우리에 있는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 또한 이러한 사실의 구체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부여계를 대변하는 동물은 '매'가 아니라 '사슴'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관련하여 매를 ‘신의 화신’ 또는 최초 ‘샤만의 조상’ 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마한 지역에 유포되었다는 견해는 시사적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예맥족의 새, 사슴에 대한 신앙이 지역으로 분화되어 갔는데,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는 사슴과 관련된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은 백제가 부여계통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 신라나 마한 남부 연맹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계있는 언급이 자주 나온다. '매'는 백제 계통이 아닌 마한 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용맹함을 상징하는 '매'가 국호까지 '남부여'로 바꾸며 부여족 계승 의식을 강조하였던 백제의 상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매'가 백제의 별호라는 인식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매'는 백제 아닌 또 다른 집단을 대변하는 상징동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응준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삼국유사』의 황룡사 9층 목탑 건탑(建塔) 설화에 나와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유명한 건축가 아비지가 설계한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으나, 고려 무신 집권기 침입해온 몽고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불보사찰로 유명한 양산 통도사를 세우고 계율종을 열었던 자장대사가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세웠다고 한다. 자장의 꿈에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아홉 나라를 진압할 수 있다고 신령이 게시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1층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鷹遊) 6층 말갈 7층 丹國(란국-거란) 8층 女狄(여적) 9층 예맥 등 당시 동아시아 모든 나라가 포함되어 있으나, 선덕여왕 당시 신라에 계속 위협을 가하던 고구려, 백제의 이름이 없어 의아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9층 예맥이 고구려라고 하면 나머지 5층의 응유가 백제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곧 응유가 응준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응준이 백제의 별칭이라는 인식을 7세기 전반 선덕여왕 때까지 신라인들은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신라인들은 ‘백제’나 '남부여'라는 국명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당시 백제 사회 내부에서 사슴을 상징으로 하며 '남부여'라고 국명을 바꾼 부여계통의 백제 왕실과 달리 '매'를 상징으로 하였던 또 다른 세력이 백제의 주류를 형성하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곧 신라인이 언급한 응준은, 사슴을 상징으로 하며 '남부여'로 국호를 고치었던 부여계통의 백제 왕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매'를 상징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갔던 세력, 곧 마한 남부 연맹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조법종은 '응유' 곧 '응준'은 부여계 유이민 세력을 대변하는 명칭과는 다른 계통이라고 살폈다. 그는 '응준'을 백제가 형성되기 이전의 정치체, 말하자면 삼한 사회의 문화적 특징으로 살펴 '伯濟'·'十濟'·'百濟'·'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부여계통성과 구분하는 의미로 살폈다. 말하자면 '응준'은 백제가 구체적 존재로 등장하기 이전 또는 다른 지역 세력 명칭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응준'을 부여계통과는 다른 집단으로 파악한 것은 탁견이다. 다만 그가 응준을 백제 일부로 파악한 점은 마한 남부 연맹의 상징이라 하여 백제를 상징하는 남부여와 대칭되는 것으로 살핀 저자와는 견해가 다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에 남부여라는 백제를 뜻하는 국명 대신에 '응준'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응준' 명칭이 7세기 전반까지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응준'이 단순한 문화적 특징이 아닌 정치적 실체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7세기 전반 선덕여왕 당시 신라를 압박한 '응준'은 부여계통 세력이 아닌 마한 남부 연맹 계통의 백제 세력이라고 살피는 것이 기록에 충실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 무렵 것으로 여겨지는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녹유탁잔에 '응준'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을 보면, 피장자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시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 '응준'이라 부르는 마한 남부 연맹의 거점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