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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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무지개의 색깔<지평선> 무지개의 색깔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언어란 자의적인 음성 기호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자의적(恣意的)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한 형식(음성)은 언어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집(家)은 영어에서는 하우스(house)라 하고, 러시아에서는 돔(dom)이라고 관습화 되어있는데 이를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한다. 이 관습화 된 언어를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되는데 이를 언어의 사회성이라고 한다. 또 언어 여러 특성 중에 불연속성이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눈·코·입·귀를 아무리 예리한 칼로 나누려고 해도 나누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언어의 불연속성(不連續性)을 대입하면 눈·코·입·귀를 분리하는데 수월해 진다. 또 무지개의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나누는 것도 언어의 불연속성 때문에 가능하다. 무지개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줄 만큼 아름답고 신비한 기상 현상이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무지개를 대상으로 시를 써서 읊기도 하고 노래도 했다. 누구나 한번은 무지개를 잡으러 가다가 포기 한 기억이 있는가 하면, 무지개가 꽂힌 자리를 찾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추억도 있을 것이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영어로 무지개(Rainbow)는 비(Rain) 온 뒤 볼 수 있는 활(bow)이란 뜻이라고 한다. 항상 활처럼 반원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무지개는 원 모양이라고 한다. 물방울에 반사돼 나오는 빛은 원뿔 모양이라고 한다. 우리가 원뿔의 꼭짓점에서 바라본다고 할 때 무지개는 원기둥의 밑면인 원의 둘레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무지개가 반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은 다른 부분이 지표면에 가려서 볼 수 없는 거라고 한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로 높이 올라가면 원형의 온전한 무지개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백과사전에 의하면 무지개는 햇빛이 물이나 유리 같은 투명한 물질을 통과할 때 굴절이 일어나 여러 색깔로 나뉘어 보이는 현상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또 비가 온 직후 대기 중에는 아직 물방울들이 떠다니고 있는데, 햇빛이 물방울 속으로 들어갔다가 물방울 뒷면에서 반사된 후 원래 빛이 왔던 방향으로 다시 빠져나오게 된다. 빛이 물방울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빛의 굴절이 일어나게 되는데, 빛은 색깔에 따라 꺾이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바깥쪽 빨간색부터 안쪽 보라색까지 빛들이 스펙트럼으로 나타난다. 이게 바로 무지개이다. J일보에 의하면 태양빛뿐만 아니라 달빛으로도 무지개가 생길 수 있는데, 이를 달 무지개(moonbow)라고 한다. 달빛은 태양빛보다 약하기 때문에 무지개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고 보기도 어렵다. 안개처럼 매우 작은 물방울에 햇빛이 비쳐 생기는 무지개는 ‘안개무지개(fogbow)’라고 한다. 보통 희미한 하얀 색으로 보인다. 안주현 박사(서울 중동고)는 “일몰이나 일출 때 대기 중 수증기가 많으면 붉은색의 단색 무지개(Monochrome rainbow)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또 “일몰 때 태양 빛은 상대적으로 두꺼운 대기층을 지나야 해서 파장이 짧은 파란색 등은 다 산란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장이 긴 붉은색만 눈에 보인다.”고 설명한다. 대기 중에 수증기량이 많아서 물방울이 크면 ‘쌍무지개’가 생기기도 한다. 반기성 케이웨이터 예보센터장에 의하면 “두 번째 무지개는 햇빛이 물방울 안에 들어가 한 번 더 반사되기 때문에 첫 번째 무지개와 반대로 안쪽이 빨간색이고 바깥쪽이 보라색이다. 빛은 굴절과 반사를 거치며 전체적으로 양이 줄어들어서 두 번째 무지개는 첫 번째 무지개보다 흐릿하게 보인다.”고 한다. 첫 번째 무지개는 ‘수무지개’, 두 번째 무지개는 ‘암무지개’로 부르기도 한다. 지난달 집중호우로 공기 중에 물방울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가 쌍무지개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지개가 빛의 굴절로 인해 나타난다는 과학적 원리를 처음 규명한 사람은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였고, 지금처럼 무지개 색채를 일곱 가지로 정한 사람은 영국의 과학자 뉴턴(1642~1727)이라고 한다. 뉴턴은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다양한 색깔로 나뉘는 모습을 실험으로 확인했는데, 이를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해 기록했다. 서양에선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계, 행운의 숫자 ‘7’처럼 7이 완전한 숫자라는 인식이 있어 이에 따라 일곱 색깔로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옛 선조들은 무지개를 흑·백·청·홍·황(黑白靑紅黃)의 ‘오색 무지개’라고 불렀다. 여기서 오색(五色)은 글자 그대로 다섯 색깔이 아니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뜻한다. 영·미 권에선 남색을 제외하고 여섯 색깔로 표현하는 곳도 있고, 아프리카에선 부족마다 달라서 심지어 30 가지 색깔로 표현하기도 한다. 색에 대한 지식이나 문화에 따라 무지개 색도 다르게 나눈 것이다.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것도 언어의 불연속성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무지개를 관찰하면 수많은 색이 뚜렷한 경계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207가지 색깔까지 구분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의 눈으로 확인 가능한 범위라고 하니, 진짜 무지개 색은 몇 개나 되는 것일까. 과학은 끝없이 걸어가는 인류의 발걸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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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나들목> 확대지향의 사회<삶의 나들목> 확대지향의 사회 윤창식(논설위원, 외국어교육학박사)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에른스트 슈마허(E. Schumacher)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담론을 통해서 성장지상주의를 비판하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자본주의의 맹점에 대해 불교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철학에서 대안을 찾고자 했다. 그의 "적은 것이 많은 것 보다 낫다"(Less is better than more)는 이념은 과유불급의 폐해를 적절히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슬로문화와 슬로시티 운동과도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큰 것이 좋다는 이른바 '대물(大物) 신드롬'에 적잖이 물들어 있는 듯하다. 우리 귀에 익숙한 '동양 최대'라는 말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이는 순전히 어떤 사물의 크기를 내세워 위세를 부려보려는 냄새를 풍긴다. 그러한 태도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일시적인 우쭐함을 심어줄지는 몰라도, 한편으로 외형지상주의를 부추길 위험성을 안고 있다. 크기에 자유롭지 못하면 남의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나아가 상대적으로 작아보이는 자신에 대해 주눅들어 한다. 이는 자신을 커보이게 하기 위해 무리를 낳고 불실을 키우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쉽다. 주거용 집도 자동차도 남못지 않게 커야 하고 냉장고도 집채만한 것이어야 사람다운 행세께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다못해 영업집 간판도 옆집 가게 보다 크고 요란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안분지족(安分知足)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상당수 한국 사람들이 물건 크기로도 모자라 자기 몸뚱아리에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눈 코 가슴 등 외부로 드러나는 모든 신체 부위를 서양인의 크기에 맞추려는 시도는 자못 우스꽝스럽다. 성형천국이라는 명칭은 결코 칭찬의 말이 아니며 한참 부끄러운 일이다. 일부일지는 몰라도 중독성 성형은 성형 본래의 순기능적인 취지를 무색케 하는 안쓰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몽고반점을 엉덩이에 타고난 배달의 민족이 무엇이 모자라 앵글로색슨족을 닮지 못해 안달일까. 흔히 금수강산이라 일컬어지는 한반도는 지리적인 형세나 풍토적인 측면에서 확대 지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형세에 알맞게 점지되고 태어나 반 만년 동안 쉬임없이 역사의 물줄기를 달려오지 않았는가. 물론 현대적 의미의 국가 사회를 경영하는 데에는 새로운 첨단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글로벌시대에는 선진국의 훌륭한 제도나 문화는 당연히 받어들여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근대화 내지 현대화 과정은 서양 '흉내내기' 특히 미국주의의 추종 과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나라는 풍토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점은 자칫 놓치기 쉬운 사실이다. 두 나라의 역사적 편차는 말할 것도 없고 지리적 여건이나 인종 분포 등 어느 것 하나 서로 닮은 데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아메리카 대륙은 한반도보다 몇 배나 더 클 뿐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발생과 건국 과정은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풍토에 어울리도록 만들어진 미국식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되리라는 생각은 매우 단선적이며 무책임하다. 이와 같은 일은 마치 체구가 아담한 사람이 덩치가 큰 사람의 옷을 걸친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도 꼴이 사나울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지 않다. 그래도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은 '그 옷'을 어떻게든 걸치고 폼을 잡아보려고 자기 몸을 억지로 키우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차라리 측은함마저 느껴진다. 세계화시대일수록 타국의 좋은 제도는 받아들이되 우리 체질에 맞는 국가경영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남의 외양적 제도를 그대로 베껴다가 어거지로 시행한다면 그 부작용과 시행착오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새벽에 미국 증권시장의 나스닥지수가 기침을 한 번 하면 우리의 증시 코스닥은 고약한 미국발 바이러스에 걸려 대낮에도 피울음을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적 가치들인 개척정신이나 철저한 법치주의 그리고 체질화된 자원봉사 정신 등은 어느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바람직한 덕목이다. 하지만 '소비가 미덕'인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를 선망하여 마구잡이로 의존 효과에 휘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이념을 무조건 신봉하고 추종하는 것은 자칫 외형적 크기에만 집착하고 계량주의에 함몰되어 자신도 모르게 공룡화 되어가는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공룡은 너무 큰 몸집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현대인들은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편승하려고 아우성친다. 더디 가는 것이 결코 늦은 것이 아님을 왜 모르는 걸까. 작은(적은) 것에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지혜로운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분별한 욕망의 배출을 줄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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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독일의 여걸 앙겔라 메르켈<지평선> 독일의 여걸 앙겔라 메르켈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앙겔라 메르켈 독일의 총리가 오는 9월에 정계에서 은퇴한다. 앙겔라 메르켈은 2005년부터 독일의 연방총리를 역임하고 있다. 남자가 못한 일을 척척해낸다고 하여 독일 국민들은 그를 영걸(女傑) 총리라고 부른다. 또 세계인들은 ‘독일판 철의 여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2005년 9월 18일 독일 총선의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 독일 정치계가 발칵 뒤집혔다. 여왕이 여러 차례 통치한 영국과 달리, 세계 2차 대전 이후의 독일은 여성이 중앙정부를 통치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가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 동독 출신인 데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물리학도였고, 이혼한 경력도 있었으며, ‘정치란 법대(法大)를 나온 남자들의 전유물’이라 여기던 독일 정치계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2005년 11월 그는 제8대 독일 연방 총리에 선출되었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9년 메르켈은 다시 한 번 총리로 선출 되었다. 2021년 9월까지면 16년 동안 총리로 재직한 샘이다. 11년간 영국 총리를 지낸 마거릿 대처의 기록을 깬 메르켈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와 ‘최연소 취임 총리’라는 기록에 이어 ‘4선 연임 성공’이라는 명예까지 거머쥐었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그리스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사태 등 국제적 현안이 제기되었으나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메르켈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마무리 하였기에 포브스 올해(2015)의 인물에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의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서독지역인 함부르크에서 1954년 7월 17일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다. 현재는 앙겔라 메르켈 이다. 아버지는 베를린 교외 출신의 루터교회 목사였고, 어머니는 함부르크 출신의 영어교사였다. 아버지가 동독으로 발령 나면서 앙겔라 메르켈이 갓난아기일 때 부모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옮겨 가던 시절에 그녀의 가족은 특이하게도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케이스이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울리히 메르켈과 1977년에 결혼해 성을 메르켈로 개명하였다. 1978년에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자마자 메르켈은 동베를린의 베를린 독일 과학원 물리화학 연구소에 들어가 남편과 함께 일하며 박사과정을 밟게 되나, 둘 사이 관계가 틀어져 1982년에 이혼하였다. 이혼 후에도 학위과정을 계속해 1986년 양자화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통일된 국가를 위해 뭔가 해 보고 싶다는 꿈이 생긴 메르켈은 1989년에 독일 통일을 내세우는 민주개혁(AD)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독일이 하나로 통일되자, 1990년 8월 DA와 기민당(CDU)의 합당으로 기민당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치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통일 독일을 이끈 사람은 콜 총리였는데, 어느 의원이 메르켈을 콜 총리에게 소개해 주자, 콜 총리는 당차고 용기 있는 메르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서독의 상황도 잘 알면서 동독을 대신해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했는데, 메르켈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콜 총리의 신임을 얻은 메르켈은 1991년 1월, 서른일곱의 나이로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메르켈은 ‘콜의 정치적 양녀’라고 불렸고, 수수한 외모 때문에 ‘동독의 촌닭’이라는 놀림도 받았다. 이때 메르켈의 정치적 후원자 콜 총리의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자 사람들은 메르켈까지 싸잡아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가 속한 기민당도 위기에 빠졌다. 고민 끝에 메르켈은 콜 총리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공격했다. 이를 본 동료들은 키워주니까 배반한다고 메르켈을 야유했다. 결국 콜 총리는 물러났고 국민들은 배짱과 지도력을 갖춘 메르켈을 ‘당을 구한 잔 다르크’라고 불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메르켈은 총선을 통해 총리로 선출되면서 16년 간 독일을 통치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총리 재직 기간에 국민총생산량이 2조 8천억 달러(2005년)에서 3조3천억 달러(2021년), 1인당 GDP가 3만4,500 달러에서 4만 6500 달러로 향상되었으며, 국가 청렴도도 세계 16위에서 9위로 껑충 뛰었다. 실업률은 10.7%에서 3.3.%로 낮아지는 등 정치적·경제적 대응 능력이 뛰어났다. 노르트스트림2도 완성단계다.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 북서부에서 출발해 발트해 해저를 지나 독일 북부에 이르는 길이 1225㎞ 해저 가스관이다. 노르트스트림1이 앞서 2012년 가동을 시작했고, 러시아와 독일은 그 바로 옆에 2018년부터 쌍둥이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현재 공정률은 98%에 이른다. 이 가스관의 한 해 수송량은 550억㎥로 유럽 천연가스 수요의 4분의 1에 달한다. 이와 같은 경제발전의 뒤안길에는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지난달 중순 서유럽 전역을 강타한 유례없는 홍수로 독일에서만 최소 197명이 숨지자 독일 정부는 자연재해라고 발표했으나,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란 비판이다. 왜냐 하면 독일과 국경을 맞댄 네덜란드에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로 단 한 명의 사망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사지 슈피겔은 21일 “연방기상청과 지방정부 간 소통이 안 되고 있다.”며 국민들이 제때 경고를 받지 못해 피해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메르켈의 인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1989년 정계 입문 후 32년 정치 역정의 마지막에서 위기를 맞은 메르켈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잘 마무리 하여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걸답게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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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 동화 속 환상과 유아 독자<아테나> 동화 속 환상과 유아 독자 노운서(논설위원, 교육학박사) 요즘 유아기부터 컴퓨터 게임을 접하는 추세로 게임 과의존 유아 및 아동들이 늘고 있어 정신과 의사들이 우려를 금치 못한다. 젊은 부모들이 디지털 세상을 대비하기 위해 혹은 바쁘고 힘든 육아를 핑계로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 게임을 틀어 주는 것이 원인이다. 필자가 유아교육기관을 운영할 때 일이었다. 7세된 남아가 하루종일 게임기 음향 소리를 흉내내고 다니는 통에 같은 반 아이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모와 상담한 결과 프로게이머를 시키기 위해 일찍부터 게임을 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유아기나 아동기 에 컴게임을 일찍 접하면 정상적인 뇌 발달에 저해가 되어 인성형성에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었다. 심각함을 느낀 나는 유아들의 게임중독 예방 동화를 쓰기 시작 했다.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 도깨비’는 그렇게 해서 탄생 되었다. 필자가 집필한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 도깨비’ 는 유아 게임중독 예방 동화로 생활요소와 환상요소가 혼합된 동화 유형이다. 유아들이 경험해본 컴퓨터 게임에 관한 내용인지라 유아들의 감정이입과 동일시가 잘 일어나 이해가 쉽도록 썼다. 특히 도깨비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 공간적 이동을 하는데 유아들은 컴퓨터 속 공간에 대해 상상하는 인지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도깨비가 컴퓨터 속에서 튕겨져 나오는 마술적 장면 또한 유아들의 물활론적 발달 특성을 자극, 흥미를 지속 시킬 수 있는 대목이라 즐거운 상상과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환상적 요소는 출간 이후 책이 꾸준히 팔리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동화 선택은 부모가 해주는 만큼 유아들의 게임중독에 대한 부모들의 염려가 커 교육적 기대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화에서 환상적 요소란 유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가는 것일까? 도깨비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마술적 존재로 전래동화의 단골메뉴이다. 왜냐하면 유아들은 피아제의 주장대로 물활론, 인공론, 실재론과 같은 특성으로 세계를 이해하는데 그러한 특성은 동화 속 환상과 부합되어 더 강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현실은 이루어진 세계이고 환상은 이루고 싶은 세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환상을 꿈꾸며 어떻게든 그것의 실현을 향해 살아가게 되어있다.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게도 그런 꿈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내몰려 성냥을 팔아야 하는 소녀, 성냥은 팔리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 갈수도 없는 소녀는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팔아야할 성냥개비를 긋는다. 그러자 빨갛게 타오르는 성냥불빛 속에 이루고 싶은 세계가 비쳐 보인다. 따뜻한 난로와 음식,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운 할머니가 나타난다. 소녀는 할머니의 환상을 계속 머무르게 하기위해 성냥을 그어댄다. 마침내 할머니에게 안긴 채 하늘로 올라간다. 허기진 사랑을 채우며 행복한 모습으로 얼어 죽어있는 소녀.... 이처럼 환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화가 환상적인 것에 치우치면 유아의 마음 균형이 깨지므로 일상생활 동화도 필요하다. 한편 환상을 통한 욕망의 실현이 때론 아이들에게 고정 관념을 심어 줄 수 있다. 그 이유는 세계유명동화 두 편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백설공주(독일:그림형제,1785년~1863년)와 신데렐라(프랑스:샤롤페로1628년~1703년)는 그 당시 평민들의 염원이 마술적 환상을 동원하여 왕자의 구원으로 이어지는데 마술적 힘에 의해 아름다운 옷과 외모로 왕자님의 선택을 받고 신분상승, 해피엔딩이 된다. 이러한 결말이 아이들의 마음에 무슨 생각을 심어 주었을까? 그 동화를 읽고 자란 여성세대들은 공주처럼 희고 고운 얼굴에 예쁜 옷입기를 무의식적으로 선호하게 되고 여성외모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무의식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또한 남자의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고정관념을 생산 할 수 있다. 흔히들 미련한건 용서해도 못생긴 건 용서 못한다는 남성들끼리의 우스갯소리도 반 페미니즘적 사고를 표출한 언어 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꼬집기 시작한 사회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반증하듯 여성학자 바바라 G. 워커의 <흑설공주 이야기(Feminist Fairy Tale)>(뜨인돌 2002)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동화를 새롭게 쓴 페미니즘 동화책이다. 그녀는 기존 동화 속의 여성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비판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성격과 특징들을 부여한다. 따라서 풍족히 살고 있는 현대 유아들에게 백설 공주나 신데렐라 같은 환상동화는 비판의식이 결여된 유아에게 부적절 하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의 동화는 발달 연령별로 적합하게 세분화 하므로 권장사항에 따라 다양한 주제의 환상동화, 생활동화, 지식동화 등을 선택해 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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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나들목> 식문화와 문화상대주의<삶의 나들목> 식문화와 문화상대주의 윤창식(논설위원, 외국어교육학박사)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저서를 통해서 세계 여러 민족의 특이한 식문화를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어느 민족에게나 존재하는 선호 음식(favorite food)과 금기 음식(taboo food)이 생겨난 문화적 배경과 이유를 설명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어떤 특별한 음식을 선호하거나 터부시하는 것은 어느 인종에게만 국한된 생물학적 특수성보다는 풍토적인 배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이 매우 혐오하는 생쥐를 실제로 식용하는 종족이 지구상에 꽤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쥐고기를 특별히 좋아한다는 인종적인 근거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의 시각으로 타민족의 식문화를 조롱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흔히 인도인들은 소를 숭상한다고 하지만 이것도 단순히 힌두교라는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소는 한마디로 농경사회에서는 귀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소는 밭갈이를 위한 노동력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배설물은 질좋은 퇴비가 될 수 있으며 소의 변을 건조시키면 훌륭한 땔감으로 된다. 이런 점을 대입해보면 자연스럽게 소를 신성시 할 수밖에 없는 문화인류학적 배경이 성립한다. 기실 소를 귀하게 여기는 나라는 인도만이 아닐 것이다. 기계화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는 가정의 한 식구나 다름 없을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주로 초식성 식품을 소비하는 문화권에 속했다. 그러나 농업 생산성이 그다지 높지 않던 시절의 경우 아무리 집을 지켜주는 충견이라 할지라도 식량이 부족한 춘궁기에는 개고기가 하나의 훌륭한 단백질 보충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을 것이다. 그러한 토속적인 생태환경이 어우러져 보신탕이라는 식문화를 낳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고기가 식용으로 발전한 식문화적 흐름 속에 한국인의 동물에 대한 잔인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 못지 않게 순박하며 평화를 애호하는 민족이라는 사실은,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공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개고기를 식용하는 행태에 대하여 풍토적 배경을 무시하고 서양식 잣대로 시비할 일은 결코 아니다. 물론 동물보호라는 차원으로 본다면 개를 식용으로 삼는 것은 잔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편협한 시각으로만 따지면, 언필칭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다는 프랑스인들이 어찌 원숭이골을 식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소의 껍데기를 '잔인하게' 벗겨서 구두를 만들어 신고 다니는 최초의 사람들은 서양인이 아니었던가. 그에 비하면 소를 귀히 여기며 벼의 짚으로 만든 짚신을 애용한 우리 선조들은 결과적으로 그들보다 몇 배로 동물을 사랑하는 민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인들이 약소국가들에게 저지른 약탈의 식민지 역사를 잊었는가? 순진무구한 아프리카 땅에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중남미에서 유럽의 침력자들이 벌인 잔학한 행위는 지워지지 않는 인류의 치부이자 상처다. 유럽 여러 국가의 축구대표팀 선수 중 상당수는 아프리카 식민지 노예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프랑스가 자랑하는 지네딘 지단이나 티에리 앙리의 몸속에도 피식민지인이라는 아픈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피지배인들을 도륙하고 약탈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개고기 문화에 대하여 비판할 자격이 없다. 어느 특정한 문화 현상에 대하여 시비하는 것은 각 나라의 고유한 역사성과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며 동시에 악의적인 백인 우월주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 천년에 걸쳐 이룩된 역사나 풍속은 어떤 제도나 시스템 혹은 결의로써(설사 국제법적인 구속력이 있다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규제되거나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문화를 편협하기 짝이 없는 잣대로 규범화하려는 시도는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거듭 실패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문명화된 대도시의 스카이캐슬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남태평양의 수상집에서 생활하는 토착민에게 "당신들은 바보처럼 물 위에서 사느냐"고 비아냥댄다면, 반대로 "당신들은 모질이처럼 어지럽게 높은 곳에서 사느냐"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애꿎은 우리의 개고기 문화가 무슨 일만 있으면 사람들 입방아에 함부로 오르내리는 것은 반만년 역사를 가진 고유한 문화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입맛이 씁쓸할 뿐이다. 식문화를 포함한 모든 문화의 속성은 자연의 이치에 어울리도록 파생하여 상대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결코 높낮이를 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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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이야기> 인공지능 시대의 돈키호테<IT 이야기> 인공지능 시대의 돈키호테 金在珥(논설위원, 공학박사) 2016년 봄, 우리 인류는 경이로운 한 사건을 접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서울에서 총 다섯 차례 치러졌는데 알파고의 4승 1패로 끝이 났다. 필자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한낱 기계라고 치부했던 알파고가 세계챔피언 8회 우승 기록을 보유한 바둑천재인 인류 대표에게 압승했다는 사실 만으로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AI(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고나 학습 등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컴퓨터를 통해 구현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광범위한 개념이지만, 그 능력에 따라 세 가지 등급으로 구분된다. 어느 특정 방면에서만 잘하는 약 인공지능(ANI, 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 여러 방면에서 모두 인간과 겨룰 수 있는 강 인공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제일 총명한 인류의 두뇌를 훨씬 뛰어넘는 초 인공지능(ASI, 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이다. 현재 인류는 이미 약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우리 생활에 많은 편리함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현재의 약 인공지능은 최악 상황을 고려해보더라도 고작해야 코드의 버그로 인한 프로그램 고장으로 정전, 대형플랜트의 고장, 금융시장 붕괴 등의 단독적인 재난이 발생하는 정도일 것이다. 필자에게 경계심과 섬뜩한 느낌을 불러온 알파고는 이 중 약 인공지능에 속한다.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 리'는 지난 40년간 바둑기사들의 대국 기보 16만 건이라는 빅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이다. 그 이후 2017년 가을, 알파고 리와 대결해 100전 100승을 거둔 알파고 제로는 바둑의 기본법칙만을 학습한 후 인공지능끼리 바둑경기를 거듭하며 모의실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강화 학습한 딥러닝 인공지능이다. 약 인공지능도 만만치 않은데, 미래에는 더 다종다양하고 더 유능한 인공지능들이 줄줄이 나타나서 인간 노동자가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지 모른다. 예를 들면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면 많은 운전기사가, 통번역기가 일상화되면 통역사와 번역가는 물론이고 외국어학원과 강사들이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약 인공지능이거나 인간 수준의 범용 인공지능이다. 문제는 초 인공지능이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이 오면 AI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특이점에 도달해 초지능 시대가 열릴 거라고 예측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촉발한 비대면 일상으로 AI 발달이 유례없는 속도로 확산되는 지금, 그날은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능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 중인 초인공지능이 딥러닝과 자체 강화학습을 통해 인간 지능을 훨씬 능가한다면, 우리 개개인과 전체 사회는 어떤 통제 체제 속에서 미래를 맞게 될까? “AI로봇이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지 않을까?” 더 나아가 “인류는 비참하게 멸망할 수 도 있겠다.” 라는 생각에 까지 미친다. 하여 AI라는 괴물과 격투를 벌여야겠다는 돈키호테 같은 생각을 해본다. 필자는 수년전 스페인을 여행하던 중, 톨레도에서 남쪽 그라나다로 가는 길에 ‘콘수에그라’라 불리는 마을을 방문하였다. 마을 언덕 위에 관광용으로 만든 돌지 않는 풍차가 있는 16~17세기에 걸친 스페인의 전성기에 살았던 세르반테스의 대표작 ‘돈키호테’의 무대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가 산초의 만류를 뿌리치고 풍차를 거인이라고 여겨 결전을 벌이는 무모한 소설속의 장면을 떠올리며, “우리 인간은 좌충우돌형의 DNA가 내재된 또 다른 돈키호테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 이 있다. 세르반테스가 AI 시대에 다시 환생해서 돈키호테-2를 쓴다면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시대를 뛰어넘는 해학으로 인공지능 시대의 신 돈키호테를 통해 우리 인간에게 휴머니즘이 살아있는 AI 시대를 만들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던질 거라는 생각을 해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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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슈> 이재명의 호남 비하 발언을 규탄한다<오늘의 이슈> 이재명의 호남 비하 발언을 규탄한다 金昌辰(전 초당대 교수. 문학박사) 최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호남 비하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그 발언은 두 가지로 잘못되었다. 하나는 21세기에 ‘백제’를 거론함으로써 지역감정을 부추겼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 발언은 사실도 틀렸다는 점이다.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호남을 비하했다는 점이다. 첫째, 지역감정 조장은 큰 문제이다. ‘백제’는 무려 1500년 전, 삼국시대 때 나라이다. 21세기에 무슨 백제 타령인가? 왜 이재명은 그런 말을 할까? 지역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이득을 보려는 저열한 의도가 아닌가. 이재명은 얼마 전, 고향인 안동에 가서도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했다. "과거 한때 군사 독재정권이 지배 전략으로 영·호남을 분할해 차별했을 때 어쩌면 상대적으로 영남이 혜택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세상도, 정치구조도 바뀌었다. 오히려 영남 지역이 역차별받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왜 이재명은 입만 열면 지역감정을 부추길까. 영남인이 호남인보다 인구수가 많으므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면 이낙연보다 표를 더 많이 받아서 이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영남이 역차별받는가? 문재인 대통령, 김명수 대법원장, 김부겸 국무총리가 어디 사람인가? 모두 영남인들이다. 또 조국, 김경수, 추미애, 이재명 등 현재 큰소리치는 사람들도 거의 영남 사람들이다. 경상도 정권에서 영남이 역차별받는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경상도 정권에서 요직은 영남인이 다 차지하고 있다. 호남인은 욕먹을 자리에서 궂은일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검찰을 보면 김오수 검찰총장을 비롯해서 이성윤, 심재철 등 호남 검사들은 정권을 지키는 앞잡이로서 가장 욕먹는 사람이 되고 있다. 또 예산을 보아도, 영남과 호남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공항 하나만 살펴봐도 안다. 부산에 가덕도 신공항을 만든다고 특별법까지 만들어서 30조 원 이상을 투입한다고 한다. 그런데 호남에는 몇 천 억원이면 될 흑산도 공항을 10년 넘게 안 만들어주고 있다. 이런데 이재명이 ‘영남 역차별’을 말하는 건 영남인에게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서 몰표를 받으려는 야비한 의도 때문이다. 둘째, 이재명의 호남 비하 발언은 사실에도 맞지 않다. 이재명은 이낙연에게 “꼭 잘 준비하셔서 대선에서 이기시면 좋겠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백제(호남) 이쪽이 주체가 돼서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충청하고 손을 잡은(DJP연합) 절반의 성공이었지 않나. 이긴다면 역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재명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김대중은 전라도다. 김종필은 충청도다. 두 분 다 백제 권역이다. 두 분이 손잡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태준 총리와 손잡고 동서화합에 힘썼다. 김 대통령은 ‘정치보복’도 하지 않았다. ‘적폐청산’도 없었다. 당시 한국은 IMF로 어려울 때였다. 김 대통령이 호소하자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그리하여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은과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하여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리하여 백제가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것이다. 이런데도 이재명은 역사를 왜곡하여 호남인을 비하했다. 오히려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적이 없다. 통일신라는 고구려 옛 땅은 회복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경상도 출신 대통령이 많이 나왔지만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모두 북한과 강경 대치했다. 또 노무현은 북한과는 정상회담을 했지만 모난 정치로 한국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리고 문재인은 북한에는 온갖 지극 정성을 다하여 모신다. 하지만 패거리 정치로 한국을 심각하게 분열시켜 놓았다. 이재명은 지역감정을 부추겨서 경상도 사람들의 몰표를 받아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려 한다. 그래서 이재명은 민주당의 대선배인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 성과를 부정해버렸다. 이런 이재명을 호남인은 그냥 두어야 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내 ‘적폐청산’이니 ‘검찰개혁’ 같은 과거 문제에만 매달려서 나라를 후퇴시켰다. 다음 대통령은 미래를 보고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사람을 뽑아야 한다. 1500년 전의 백제나 소환하여 지역감정으로 이득을 보려는 사람을 민주당이 대선 후보로 뽑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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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나들목> '옷이 날개다'의 양면성<삶의 나들목> '옷이 날개다'의 양면성 윤창식(논설위원, 외국어교육학박사)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계 곳곳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화석 등을 통해서 옷의 단초를 짐작해볼 뿐이다. 신석기시대의 유물 중에 뼈바늘과 돌로 된 방추(紡錘)가 발견됨으로써 그 시대에 최초로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 후 기원 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직물을 만들면서 옷의 역사는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시인들은 원래 추위나 비바람으로부터 자기 몸을 보호할 요량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을 터이다. 인류문화사의 한 축을 관통하는 기독교 문명권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로 상징되듯 옷은 인간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옷을 전혀 걸치지 않고 살아가는 오지의 부족들이 지구상에 일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항상 유효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기도 한다. 원시적 형태의 부족들이 나름대로 정치세력화 함으로써 옷은 점차 그 정치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발전해 간다. 옷감부터 색깔과 옷 모양에 이르기까지 본래 옷이 지니고 있는 기능성보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정치사회적 신분을 재는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 문명의 원류격인 로마시대와 동양의 복식사(服飾史)를 살펴보더라도 신분에 따라 옷을 다르게 착용한 예는 꽤 많다. 스위스 태생의 독일 작가 G. 하우프트만은 <옷이 날개다>(Kleide machen Leute)라는 단편을 통해서 신분에 따른 의복의 이면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세탁소 직공인 소년의 옷과 세탁물로 맡겨진 왕자(영주의 아들)의 의복을 대비시켜 옷 때문에 빚어지는 인간의 허위의식을 비판한 작품이다. 세탁소에 고용된 소년은 세탁물을 손질하다가 장난 삼아 같은 또래인 왕자의 옷을 입고 마을로 나가게 된다. 이런 모습을 본 부인들과 소녀들은 왕자님이 나타났다고 환호하면서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앞다투어 갖은 아양을 떤다. 이에 당황한 세탁집 소년은 왕자가 아니라고 고백했지만 여인들은 왕자의 화려한 겉옷만 보고 믿지 않다가 결국 거짓임을 알고 여인들의 태도가 금세 싸늘해져 세탁소 소년은 들판으로 쫒겨나는 신세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의복의 이중성은 일련의 시민혁명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약화되기 시작했고 경제 사정이 비교적 좋은 현대화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옷이 절대적인 신분 과시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의복이 단순히 몸을 보호하거나 또는 치부를 가리고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의식과 행동을 규범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옛 서당의 훈장들이 두루마기에 갓을 쓴 이유는 학동들에게 단순히 권위적으로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쉽게 흐트러질 수 있는 아이들의 자세를 바로잡고 진지한 배움의 태도를 심어주려는 스승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다. 법복 또한 피고인을 겁박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보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불편부당한 판결은 하지 않겠다는 재판관의 의지를 상징한다. 군인은 군복을 착용할 때 가장 군인다울 수 있고 학생은 교복을 입을 때 학생다울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제복이 집단의 의식과 행동을 규범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를 두고 단순히 제복이 인간을 획일화한다고 비판의 잣대를 들이댈 일은 아니다. 한편 양복을 빼입고 탁발에 나서는 스님이 있다면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울뿐 아니라 스님의 마음 속에 부처님의 자비가 한 톨이라도 들어있을까 싶어진다. 또한 결혼식 하객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다면 자기는 편할지 몰라도 신랑 신부에게 무례한 행위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옷은 날개이면서 동시에 날개가 아니다. 현대적 의미의 의복은 남에게 신분을 과시하고 호사함을 들어내 보이려는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단순히 자기 편하자고 옷을 아무렇게나 '걸칠 일'도 아니다. 의복은 의식의 창고인 몸을 편하게 감싸주는 한편, 자기존재를 함부로 방기(放棄)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장치로 기능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옷이 날개가 되려면, 수많은 진화 과정을 거쳐 자연친화적으로 최적화된 새와 곤충의 날개처럼 인류도 의복의 역사 속에 흐르는 사회문화적 가치를 더욱 고양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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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 강대국 대통령의 도덕적 신념과 인류의 운명<아테나> 강대국 대통령의 도덕적 신념과 인류의 운명 노운서(논설위원, 교육학박사) 강대국의 대통령이 그 내면에 어떤 신념과 인식을 가진 사람인지는 기후 위기나 코로나 위기 등에 처해 있는 지구촌의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의 신념은 평생에 걸쳐 재구성되며 다져진다. 그 사람이 어떤 인생 과정을 경유하여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지가 신념형성의 관건이다. 가정교육의 기본 틀에 학교 교육의 사회적 틀, 여기에다 삶 속에서 경험과 인간관계를 통한 스스로 깨닫는 셀프 교육이 신념과 인식을 형성하며 다져진다. 사람은 인생 역경을 겪으며 깨달을 때 긍정적 타개 방법과 타인 고충의 공감 능력, 생명의 존귀함, 진정한 삶의 의미 등 도덕적 신념도 다지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과정들을 간과하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만족적 욕구 달성에 급급한다. 얼마 전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당선자의 공약이 정반대였던 것은 신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코로나 방역을 실패로 보는 바이든의 평가와 ‘코로나 바이러스 나도 걸려 봤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별문제 될 이유 없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증가하는 트럼프 쪽의 평가로 대별되어 대선이 끝난 미국은 분열 정국이었다. 트럼프의 코로나를 무시하고 경제를 내세우는 배짱은 어떤 신념인가? 트럼프가 주장하는 가치들은 올바른 신념에 근거하며 자국민과 인류공동체에 이로웠는가? 그랬다면 재선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트럼프는 강렬한 언행으로 팬덤을 몰고 다니는 즉흥적 열정이 있었다. 작년 대선 때도 트럼프에게는 샤이(shy)트럼프, 히든(hidden)바이든이라는 이중 팬심까지 나올 정도였다.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그들을 숨게 했을까? 트럼프는 세계의 큰 형님 노릇의 국가수장으로서 역대급 수준의 정치 행보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치를 모르는 필자의 견해로 팬데믹 상황에서 목숨보다 경제 우선의 행보가 제일 놀라웠고 각종 국제기구 탈퇴, 인종 차별, 여성혐오비하 발언 등도 아연실색이다. 예를 들어 글로벌 시대 지구의 기후 위기나 생태환경 보전의 문제가 경제문제와 밀접하고 인류의 공동 과제임이 판명된 작금에 강대국 리더로서 파리기후협약을 주도한 트럼프의 탈퇴는 정의롭지 못한 결정이었다. 파리기후협약에 서명국이 195개국이다. 그 주도국인 미국이 탈퇴한 이유는 단 하나 경제 피해라고 외쳤던 트럼프.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생산 활동을 감축할 수밖에 없는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약속한 온실가스 감축목표(2024년까지 26~28% 감축)를 미국이 지키려면 3조 달러 규모의 생산 활동을 줄여야 하고 그에 따른 산업 일자리 600만 개를 잃는 경제적 손실을 감수할 수 없다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 이유였다. 바이든은 이에 반박하며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주장했다. 바이든 후보는 트위터 등을 통해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2021년 1월20일까지 파리기후 협약에 다시 가입하겠다는 글을 올렸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과오를 되돌려 놓겠다는 공약이었다. 자국민의 경제냐? 지구환경 보존이냐? 두 후보의 신념과 인식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경제활동을 위한 생산은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한 기초를 이룬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 우리는 고기는 명절날, 새 옷은 설날에나 입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요즘 아이들은 언제든 명절이지만 미세먼지로 함부로 외출도 하지 못하고 마스크 쓰고 숨 쉬며 공부에 눌려 놀지도 못한다. 현대의 문명국가들 특히 쓰레기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 사람들은 너무 잘 먹고 많이 먹어 병이 생길 지경에 다이어트가 높은 관심사이며 입을 옷은 넘쳐나 헌옷 수거함까지 있다. 그런데 지구 기후 위기의 피해국은 피해 물질을 많이 생산해내는 부자나라가 아니라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약소국부터 겪는다는 과학자들의 보고는 참 개탄스럽고 맘 아픈 일이다. 네팔의 빈곤과 탄소배출 1위인 미국의 호사(豪奢)사이에서 멈춤의 한계설정을 위한 사고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올바른 관점과 신념을 가진 강대국의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후 위기는 눈앞의 일자리 창출과 비교 할 수 없는 재해와 장기적 경제손실로 돌아오며 후손들이 살 수 없는 지구가 되기 때문이다. 마스크냐? 경제냐?의 선택에서 트럼프는 인류의 생명보다 자국의 돈을 선택했고 낙선했다. 대통령 임기 동안 잘한 일도 있겠지만 얼룩이 많은 것은 올바른 신념보다 과학자나 전문가 충고도 무시하는 즉흥적인 개인의 의지대로 국정을 꾸렸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 바이든은 그의 당선 승리 연설에서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모범을 보여 세계적 국가로 다시 태어나 위기의 지구를 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의 연설은 그가 살아온 역경의 인생 여정에서 성숙된 생명의 존귀함과 인류 평화와 사랑과 공정의 신념으로 가득했다. 바이든은 당선 후 두 번이나 다니던 성당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의 씨를 뿌린 그의 고매한 신념이 이제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위기의 지구를 구할 구조대장으로서 세계의 평화를 이끌어갈 동맹의 큰 형님으로서 중국에 맞서 강하고 담대히 나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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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한 발 더 가까워진 우주 관광의 꿈<지평선> 한 발 더 가까워진 우주 관광의 꿈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7월 20일(현지 시간) 제프 베이조스가 설립한 우주 탐사 기업 ‘블루오리진’이 만든 우주 로켓 ‘뉴셰퍼드’를 타고 100km(실지는 106km) 상공의 우주까지 다녀왔다. 여기에 탑승한 우주 관광객은 블루 오리진 최고경영자인 베이조스와 그의 동생 마크 베이조스, 82세의 할머니 월리 펑크, 18세 예비 물리학도 올리버 다먼이다. 다먼은 그의 아버지가 경매에서 2800만 달러를 내고 우주비행 티켓을 따냈지만 갑작스레 일정에 차질이 생겨 아버지 대신 로켓에 탑승했다. 이 우주로켓은 20일 아침 미국 텍사스 서부 사막지대의 발사장에서 미 동부 시간 오전 9시 12분경(한국 시간 20일 오후 10시 12분)에 발사되었고, 우주로켓의 길이는 18m이었다. 이날은 1969년 미국의 유인우주선인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지 정확히 52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폴로 11호에는 선장인 닐 암스트롱,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탑승했었다. 당시로선 미지의 영역이던 달에 최초로 인류가 착륙하면서 인류는 이후 더 먼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베이조스 역시 ‘아폴로 11호’를 보며 우주여행의 꿈을 키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우주로 향한 뉴셰퍼드는 이륙 3분 만에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로 여겨지는 고도 100km 근처(카르만 라인)까지 올랐다. 캡슐 안에 있던 베이조스 일행은 3분 동안 몸이 둥둥 떠다니는 미세중력(microgravity-중력이 거이 없는 상태)을 체험했다. 이후 캡슐과 분리된 부스터 로켓은 발사 7분 후 발사장에 귀환했고 이어서 캡슐도 자유낙하하며 3개의 거대한 낙하산을 이용해 지구로 돌아왔다. 이때의 캡슐은 3개의 대형 낙하산을 펼쳐 속도를 줄이며 발사장소로 돌아왔다. 비행에 걸린 시간은 11분가량이었다. 이들은 착륙 8분 만에 캡슐에서 나와 현장에 나와 있던 관계자 등과 포옹을 나눴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성공적인 비행을 축하했다. 착륙한 베이조스는 “인생 최고의 날(best day ever)”이라고 엄지를 치켜 올렸다. 이에 앞서 이달 11일에는 영국의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이 전문 조종사와 직원들을 태우고 우주 관광 시범 비행에 성공했다. 베이조스의 이날 비행은 브랜슨보다 9일 늦었지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조종사 없이 완전 자동으로 로켓이 구동된 점과 유료 티켓을 구입한 일반인(다먼)이 실제 탑승했다는 점에서 브랜슨의 비행과 달랐다. 게다가 고도 86km까지만 올라갔던 브랜슨의 ‘버진갤럭틱’과 달리 뉴셰퍼드는 실제 우주의 경계로 인정받는 100km 상공까지 진입에 성공했다. 블루오리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르면 올해 9월경 민간인을 태운 다음 우주 비행을 계획 중이다. 다만 티켓 가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억만장자들의 우주 관광 경쟁 시대가 점화됐다. 영국의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이 지난 12일(한국 시각) 자신이 세운 우주 기업 버진 갤럭틱의 우주선을 타고 4분간 우주의 무중력을 체험하고 돌아온 데 이어, 20일 밤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도 블루 오리진의 로켓을 타고 우주에 다녀왔다. 오는 9월에는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가 민간인만 태운 유인 우주선으로 지구 선회 관광을 계획하고 있다. 9월 일론 머스크의 기업인 스페이스X의 유인 우주선인 크루 드래건은 미국 결제 처리 업체 시프트4페이먼트의 대표인 재러드 아이작먼 등 민간인 4명을 태우고 540㎞ 상공에서 3일간 지구 궤도를 도는 비행에 나선다. 우주 관광은 지난 10년간 우주산업의 성장을 보여주는 척도다. IT(정보 통신) 산업에서 성장한 기업들이 2000년대 잇따라 우주산업에 진출해 우주로켓을 재사용하면서 발사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추어졌다. 덩달아 인공위성 산업이 성장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현재 세계에서 운용 중인 위성은 2062기로, 이 가운데 무게 500㎏ 이하 소형 위성이 930기다. 우주 관광 선두 주자를 자처한 브랜슨 회장이 노리는 시장도 바로 이 소형 위성 발사 서비스다. 2040년 우주산업은 1조 달러 시대를 예상하고 있다. 위성 영상으로 농작물 작황 상태를 분석해 곡물 가격을 예측하고, 콜레라 같은 전염병 창궐도 예측한다. 땅속의 광물 자원도 예측하고 기상관측이 가능해 홍수 피해와 기후로 인한 재난도 막을 수 있다. 최근에는 초소형 위성 군단으로 전 세계에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기업들도 나왔다. 특히 전자 장비가 발전하면서 소형 위성도 과거 대형 위성이 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사고만 없다면 우주기업이 더 늘어나면서 우주관광 여행도 수월해 질 수 있다. 아울러 가격도 싸질 것이니 살맛나는 세상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모험하면서 인간의 지혜는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