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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이중

기사입력 2020.11.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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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암(望庵) 변이중 선생은 장성 출신으로

    이율곡 성우계 선생의 문인이다.

    28세에 문과 급제 하여

    이조, 호조좌랑 예조, 형조정랑, 군기중부시정과

    외직으로는 황해도 평안도 도사, 풍기 함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중하고,

    전라도 소모사와 조도어사를 두 번, 

    독운사를 3차례나 역임하며,

    전란을 평정하는데 진력하여 호성원종 1 등과 선무원종 2 등공신이 되었다.  

    특히 왜군의 조총을 무력화시키는 변이중 화차 300량을

    자비로 창제하여 국방과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조선 중기의 성리학을 경세적 실천으로 전환한 후기 실학자에 가교 역할을 하였다.

    또한 본인이 수 천의 군사를 이끌고 양천에 배수진을 치고,

    자신이 직접 감독 제조한 화차 40량을 권율장군에게 보내

    최전선에서 최정애 공격진의 예봉을 방어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행주대첩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선생이 66세에 돌아 가시자

    조정에서는 이조참판으로 증직하고,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월사 이정구 선생은 묘갈명 해서

     

    "저들은 치달려도, 이분은 뒤졌으며, 헐뜯고 모함 할 수록, 더욱 온전 하셨도다.

    얕잡아 보려 해도, 타 넘지 못하고, 더럽혀 보려 해도, 깎아내리지 못했네.

    훌륭한 행실은 가정에 쌓았으나, 세상은 이를 용납하지 아니 했고,

    수고로움 나라에 베풀었으나, 쓰임을 보지는 못 하셨도다.

    마침내 뜻 못 이루고 돌아가시니, 아 이것이 하늘의 운명인가!"

    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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