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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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 언제나 좋은 정책 대안을 제시해주는 남악신문축사 - 언제나 좋은 정책 대안을 제시해주는 남악신문 전라남도지사 김영록 남악신문 창간 2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남악신문은 그동안 독자들께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건실한 언론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공정한 보도와 건설적 논평으로 지역발전에 큰 힘이 되어주신 박일훈 대표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격변의 시대입니다. 사회 각 분야에 많은 도전과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전라남도는 시대적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역사적인 대전환을 이끌어가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데이터, 반도체 등 첨단 전략산업을 일으켜 디지털 대도약을 앞당기고, 풍부한 청정 자원을 바탕으로 글로벌 에너지 신산업 허브를 조성하겠습니다. 빼어난 역사ㆍ문화와 자연환경을 세계인이 찾고 즐기는 관광자원으로 가꿔 세계 속의 ‘문화·관광 융성 시대’를 꽃 피우겠습니다. 전남의 비교우위 산업인 농수축산업을 고부가가치 미래 생명산업으로 키워 ‘대도약 전남 행복시대’를 힘차게 열어가겠습니다. 남악신문이 정론직필의 사명을 다하며 좋은 정책 대안을 제시해 전라남도의 발전에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남악신문이 올곧은 언론으로 흔들림 없이 커나갈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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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갤러리> 인화문뚜껑항아리<남악 갤러리> 인화문뚜껑항아리 분청사기장 정인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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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특집>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역사 특집>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 박해현(초당대 교수, 문학박사) 1. 일제, 광주·전남의 3·1운동 규모 축소·조작 광주·전남 3·1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연구가 적지 않다. 이는 1894년 동학 농민 전쟁과 1908∽1909년 한말 의병 전쟁 때 이 지역의 피해가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19년은 이들 두 차례 사건으로 시위 지도부가 붕괴가 되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세력이 성장할 시간으로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항일의 에너지를 강하게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국권침탈 후 1912년 결성된 비밀 결사 조직 '독립의군부'의 각 지역 대표 302명 중 전라도가 214명(전북 144명, 전남 70명)으로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다. 3·1운동 규모를 언급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이하 ‘혈사’)에 전라도 지역 집회횟수는 222회로, 228회의 경상도와 비슷하다. 전라도 지역 시위 규모가 적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그동안 광주·전남 지방에서 3·1운동 참여도가 낮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3·1운동을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조선총독부가 3·1운동을 진압하고 작성한 '소요 사건 별표'와 '소요 사건 일별 조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3·1운동 가담자 수에 있어 호남 지방은 전북 3,710명, 전남 2,868명으로 경기 129,528명, 충북 32,730명, 충남 40,000명보다 훨씬 적고, 시위 횟수도 3월 1일부터 4월 10일 사이에 경기 288회, 충북 56회, 충남 75회에 비해 전북 5곳 39회, 전남 10곳 44회로 매우 적은 숫자를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살피면 광주·전남 지방은 3·1운동 참여가 미약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상해에서 출판된 '혈사'에는 전남·북 지방에서 일어난 시위 횟수를 222회로 파악하여 총독부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인다. 반면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우 '혈사'에 297회와 156회로, 총독부의 288회, 133회 기록과 거의 비슷하다. 전라도를 제외한 여타 지역 시위 횟수에 대한 총독부 기록이 박은식 선생이 조사한 것과 차이가 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지방의 경우만 두 자료의 차이가 나는 까닭은, 박은식 선생이 조사한 통계가 유독 전라도 지역에서 착오를 일으켰을 가능성과 반대로 총독부가 전라도 지방의 시위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했을 가능성, 두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1972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독립운동사』에 의하면 전북은 50여 곳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였고, 전남은 53곳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책 또한 총독부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한계가 없지는 않으나 총독부 기록보다 많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광주·전남의 23개 시·군 가운데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불발로 끝난 경우를 제외하고도 각종 자료에서 확인된 횟수만도 90여 회에 이른다는 최근의 연구 성과가 있다. 전북 경우도 각종 자료에서 확인된 시위 횟수가 184회나 달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혈사'의 내용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총독부의 호남 지방에 대한 시위 횟수 기록이 의도적으로 축소, 조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된 숫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1919년 4월 16일 기준으로 시위로 인해 수감된 인원을 지역 소재 형무소 별로 살피더라도 전북 230명(5.2%), 전남 162명(3.7%)으로 전국 수감자의 8.9%에 달하고 있다. 총독부 기록에 보이는 시위 횟수가 전남·북 합하여 전국의 1.4%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잘못되었다고 총독부 스스로 인정한 셈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순은 전라도 지역의 시위를 총독부가 의도적으로 축소, 조작하는 과정에서 야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혈사'에서 전라도 지방의 투옥자 비율이 전체의 6.2%를 차지한다는 통계보다 오히려 높게 나오고 있다. 더욱이 이번 광주․전남 3․1운동 판결문에서 확인한 숫자만 하더라도, 1921년 목포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관련자 11명을 제외한 1919년에 일어난 시위로 재판에 넘겨진 이가 334명이나 되어 기존 연구 통계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일본 측 통계가 의도적으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남지구 일본헌병대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3월 상순에 불온문서의 배포 등이 있었으나 소요가 구체화 된 것은 없었다. 3월 10일 이후 광주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4월 18일까지 10개소, 14회의 시위가 있었다."라고 하여 전남 지방 시위 규모를 매우 미약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3월 초 경성에서 운동이 발생하자 각 도 경무부장이 교직원, 종교 지도자, 단체 및 관리 등에 대한 훈육을 강화하고 감시와 사찰, 취체, 정찰, 밀고, 설득, 폐시(閉市) 등을 철저히 한 결과라고 자체 평가까지 하였다. 말하자면 전남 지역이 동학 농민 전쟁의 중심지였고 한말 의병 전쟁의 최후 격전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일본 군경(軍警)이 사전 예방 활동을 다른 지역보다 훨씬 주도면밀히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의 시위가 총독부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결코 미약했거나, 그 투쟁 강도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시위 횟수, 참여 인원, 사망자, 부상자, 투옥된 인원 등이 말해주고 있다. '혈사'에 수록된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만 보더라도 경상도가 가장 많고 평안도,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가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총독부 스스로 인정했듯이 전라도 지역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전남 지방에서는 그것을 뚫고 독립의 의지를 뜨겁게 쏟아 내고 있었다. 광주·전남 지역 시위는 지도층 인사보다 일반 민중이 시위를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3·1운동으로 처벌받은 기독교인들을 보면 평신도가 징역형 93%, 집행유예 85%를 차지하여다. 이는 동학 농민 전쟁과 항일 의병 전쟁을 통해 형성된 민중의 항일 의식이 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총독부는 광주·전남 지방의 이러한 시위 양상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전남·북 경무부에서는 다른 지역으로의 시위 파급을 염려하여 그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격렬하지 않은 시위는 누락시켜 규모를 축소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광주·전남 지방에서 일어난 시위가 얼마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지역의 3·1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소극적이었다거나 강도가 미약하였다고 하는 기존 견해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광주·전남 지역의 시위 규모 및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광주·전남 3·1운동 시위 관련 판결문 분석이 필요한 까닭이다. 광주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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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나의 인생, 나의 농민 운동(2)<특별 기획> 나의 인생, 나의 농민 운동(2) 농민운동가 정관수 선생 편집 주 : 정관수 선생은 전남·무안에서 농민운동가로 유명하시다. 본보 발행인 박일훈 박사는 교수 재직 시절부터 두 분의 농민운동가와 오랫동안 친분을 가져왔다고 한다. 한 분은 기독교농민회 전국회장을 역임하신 김홍재 선생이시고, 또 다른 한 분은 여기서 소개하는 정관수 선생이시다. 김홍재 선생은 불행하게도 코로나 19가 한창이던 작년에 작고하셨다. 정관수 선생은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장과 전국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셨다. 더욱이 김홍재 선생과 정관수 선생은 남악신문 창간 때부터 흔쾌히 본사 고문직을 맡아 주셨다. 지난 29호에 이어 정관수 선생의 <나의 인생, 나의 농민운동>을 연재한다. (지난 호에 이어서) 2. 80년대의 농민운동, 그것은 투쟁의 역사 지금 돌이켜봐도 전두환 정권은 군부 독재정권이었다. 농민들은 살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농민들에겐 박정희의 유신 독재정권보다 살기 수월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갔다가 가톨릭 윤공희 주교님(현, 대주교) 등의 구명운동의 덕택으로 겨우 살아 돌아온 정관수 선생은 1981년 38살의 패기 있는 나이에 가톨릭농민회무안군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당시 전남지역 농민들을 특히 힘들게 했던 이슈들 중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수세(水稅)였다. 수세란 보에 고인 물을 이용한 값으로 나라에 내는 돈이나 곡식을 말한다. 농민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불가피하게 나주나 함평 등지의 농업용 저수지에서 물을 받아다가 쓸 수밖에 없다. 저수지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지었으니 세금을 내라는 것이다. 참 지독한 시절이었다.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우리나라는 농업용수 수세에 대해 이를 완전히 폐지했지만, 그때까지 농민들은 터지는 분통을 달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농지세였다. 1984년 농지소득세가 개정되기 이전까지는 농업소득의 원천에 따라 미작소득(米作所得)에 대해 부과하는 갑류농지세와 특작소득(特作所得)에 대해 부과하는 을류농지세로 구분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양파나 마늘 같은 것을 심는 농민에게는 을류농지세를 부과하고 쌀농사를 짓는 농민에게는 갑류농지세를 부과한다. 농민들은 완전히 호구인 셈이었다. 본래 농업 세제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 부의 분배를 개선하고 농업생산을 촉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종합적인 조정과 검토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마지막으로는 쌀값 보장과 소값 보장이 문제였다. 쌀값 폭락은 농민들의 생존권 보장과 직결된 문제였다. 농민들은 나락 야적시위 등을 통해 대정부 투쟁을 선언하고 단위농협들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이에 대해 농협장들은 "매년 쌀을 비싸게 매입하고 있는 실정이라서 농협도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다”라며 반발했다. 이에 농민들은 정부에 대해 ‘밭 직불제’의 시행을 요구하고 나섰고 나아가 쌀 대북지원 사업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5년 1월 가톨릭농민회의 주관 아래 도입육우피해실태조사가 이루어졌고 그해 4월 21일 충북 청원의 서형석 농민이 소값 폭락에 죽음으로 항의하였다. 이에 전국적인 규모의 ‘전봉준 장군 90주기 추모식 및 미국 농축산물 수입개방요구 규탄대회’가 열렸으며, 미국 대사관 진입을 시도하는 시위가 연이어 벌어졌다. 특히 그해 7월에는 전국적으로 거대한 농민투쟁이 벌어졌는데, ‘소몰이투쟁’이라고 불리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저지 투쟁이었다. 정관수 선생은 당시 농민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농사일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힘들고 고단한 일이죠. 그렇다고 농사를 지어서 수익이 제대로 창출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걸핏하면 이런저런 명목으로 나라에선 세금을 마구잡이식으로 걷어 들이니 농민들이 살 수가 없었지요. 지금은 ‘농민운동’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때는 ‘운동’이 아니고 ‘투쟁’이었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주기적으로 무안성당에서 모였어요. 적게는 5.60 명씩, 많게는 100여 명이 무안성당 앞마당에 모여들었죠. 그렇게 싸우고 싸워서 하나둘씩 개선되었던 것이죠. 오늘날 농민들이 그래도 편히 농사지을 수 있는 것은 그때 정부를 상대로 투쟁했던 우리 같은 농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정관수 선생은 1980년대 내내 이곳 무안성당에서 농민회의 투쟁운동을 진두지휘하셨다. 3. 농민회, ‘농민정치투쟁’에서 ‘생명공동체운동’으로 노선 변경 한국가톨릭농민회는 1966년 창립되어 농민운동의 뿌리가 된 협의체이다. 한국가톨릭농민회가 창립 30돌을 맞은 1996년 11월 18일 대전가톨릭농민회관에서는 김승오 지도신부 집전으로 창립 30주년 기념미사와 기념식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한국가톨릭농민회는 농민운동의 기본노선을 ‘농민정치투쟁’에서 ‘생명공동체운동’으로 변경하였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농민회는 이미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즉, 예전의 정치투쟁과 농민운동에서 생명과 공동체 운동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공동체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군부 독재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고 온 국민의 기대 속에 문민정부와 김대중 정부가 출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농민회는 30주년을 계기로 공동체의 삶을 실천하고 농업 발전의 대안을 창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실천단계에 돌입했다. 먼저 농민회는 각 교구본부 설립으로 조직을 더욱 공고히 해 농산물의 생산과 공급의 조직화를 꾀하고 도·농간의 교류도 활성화함으로써 1994년 이후 추진해온 우리농촌살리기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유기농업과 자연농업 등 이른바 생명 농업을 개발·실천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농민회는 생산자 공동체를 건설하는 한편 농정활동도 강화해 올바른 농정이 수립되도록 하는 등 생명 농업의 모형을 제시하는 데도 앞장서기로 했다. 농업 발전을 저해하고 농민 이익에 반하는 농정과 제도를 바로잡음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농민회는 생명농업연구소와 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한편 한국가톨릭농민회의 뿌리는 1964년 발족한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농촌청년부였다. 2년 뒤 창립된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를 전신으로 하는 농민회는 7, 80년대 농민운동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 투쟁도 동시에 전개해 왔다. 이 때문에 보수성향의 주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며, 1989년 농민회 회장이던 평민당 서경원 국회의원의 방북사건이 발생해, 이를 빌미로 좌경단체로 매도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여기서 잠시 한국가톨릭농민회 농민운동의 성과에 대해 정관수 선생의 설명을 들어보자. "1975년 민간단체로는 처음으로 쌀의 생산비 조사를 실시하고 1976년 전국규모의 농민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으며, 1978년 함평 고구마 사건을 주도해 피해액 전액을 보상받는 등 고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어 왔어요.”라고 하면서, "198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인 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수세 폐지와 고추 전량수매대회를 개최하였어요. 1987년에는 야권 대통령 후보단일화 운동을 펴기도 했답니다.”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랬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한국가톨릭농민회가 투쟁 노선을 변경한 것은 1990년 2월 열린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해서였다. 국내외 정세변화에 영향을 받은 농민회는 ‘생명과 해방의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생명질서와 공해추방에 앞장서고 생명 농업에 충실해 농민을 살리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농민회는 1990년부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밀 살리기운동을 펴기 시작했으며, 1994년부터는 이를 확대해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농민회의 시류에 맞춰 정관수 선생은 1991년 자신의 사재를 은행 담보에 넣고 2억여 원을 대출받는다. 곧바로 정영제, 박태봉, 서유조, 배삼태 등 10여 명의 공동체 구성원들을 불러모아 우리밀 살리기운동을 몸소 실천해야겠노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해서 ‘무안우리밀공장’은 탄생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해 무안군 청계농공단지 내에 설립되었다. 1991년 설립한 무안우리밀공장(청계농공단지). 현재 다른 업체가 들어와 있지만, 공장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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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나의 인생, 나의 농민 운동(1)<특별 기획> 나의 인생, 나의 농민 운동(1) 농민운동가 정관수 선생 편집 주 : 정관수 선생은 농민운동가로 유명하다. 본보 발행인 박일훈 박사는 교수 재직 시절부터 두 분의 농민운동가와 두터운 친분을 가져왔다. 한 분은 기독교농민회 전국회장을 역임한 김홍재 선생인데 불행하게도 코로나 19가 한창이던 작년에 작고하셨다. 다른 한 분은 오늘 여기서 소개하는 분으로 가톨릭농민회 전남도회장과 전국부회장을 역임한 정관수 선생이다. 두 분은 남악신문 창간 때부터 본사 고문으로서 각별한 인연을 맺어 왔다. 특별 기획으로 농민운동가 정관수 선생의 <나의 인생, 나의 농민운동>을 연재한다. 1. 가톨릭농민회 무안군 협의회 결성 정관수 선생은 1944년 무안군 청계면 서호3리 기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으며 일찍이 기동 공소를 다녔다. 26세 때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했고 27세에 기동 공소 회장이 되었다. 이때 무안 본당을 다니는 이효정 여사를 중매로 만나 혼인하였으며 슬하에 3남을 두고 있다. 정관수 선생은 혼인 후 청계면 도림리로 이사하고 청계 공소로 옮겨 곧바로 이어서 공소 회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정관수 선생은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사업-가톨릭농민회 무안군 협의회 결성-을 위해 공소마다 농민회 분회를 조직하기로 작심한다. 정관수 선생의 나이 서른이 조금 넘은 때이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 공소마다 농민회 분회를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정권의 감시가 지독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무안경찰서 형사계 직원들이 매일같이 정관수 선생의 뒤를 따라붙었다. 제일 먼저 정관수 선생의 고향인 서호3리 기동 공소에서 12명의 농민이 모여 기동마을 농민회 분회가 조직돼 교육에 들어갔다. 다음으로 강정마을 강정 공소에서 8명의 농민이 모였다. 당시 강정 공소 회장은 정권진 선생이었다. 그는 구학(舊學)에 해박하고 마음 씀씀이가 늘 후덕하였다. 정관수 선생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권진 선생께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해서 청계 공소, 상마 공소, 무안 본당, 망운 공소로 농민회 분회가 봄 불 일 듯 번져나갔다. 공소마다 밤이 되면 농민들을 대상으로 매일같이 교육이 이루어졌다. 애당초 가톨릭 농민회의 이념적 기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농민의 자발적·자주적 모임을 통해 그리스도교적인 공동체 사회의 발전을 지향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1977년 함평 고구마 사건, 1979년 오원춘 사건, 1980년대 농업협동조합의 민주화, 소값 피해보상, 수세 및 의료보험 개혁, 농축산물 수입 반대, 농산물 제값받기 운동 등으로 한국 천주교 농민회는 자연스럽게 반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정관수 선생이 무안군 가톨릭 농민회를 조직할 당시에 무안에는 신용협동조합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은 미국인 메리 가브리엘 수녀가 1960년 5월 1일 부산에 설립한 ‘성가신용협동조합’(Holy Family Credit Union)이다. 신협은 고금리 사채로 신음하던 농민들을 돕기 위한 빈농구제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농민들이 스스로 자본을 모아 자금을 조성하고 이 자금을 공동으로 운용하여 낮은 이자로 서로에게 대출하자는 제도로써 잉태된 것이었다. 그래서 정관수 선생은 마음을 같이 하는 마을 유지들과 머리를 맞대고 청계 신협을 설립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곧바로 발기인들을 모집하는 한편 청계 공소에서 밤이면 밤마다 공부도 하고 전략회의도 연달아 이어져 미처 날 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정관수 선생 부인 이효정 여사의 말씀을 들어보기로 한다. "내가 스물넷에 시집을 와서 보니 남편은 이미 가톨릭 농민회에 정신이 빠져 있었어요. 저도 무안 본당 신자였기에 이해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새벽이면 집을 나가서 자정이 넘도록 집에 돌아올 줄 몰랐어요. 남편이 집안 생계를 챙겨주지 않으니 나라도 돈벌이를 해야 했어요. 마침 집 앞으로 신작로가 생겨나길래 집안을 대충 꾸며 막걸리집을 했어요. 당시 안주로는 흑산 홍어가 제일이었지요. 그런데 그이가 허구한 날 농민운동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는 공짜로 있는 막걸리에 홍어 안주를 다 먹어버리는 거예요. 돌아갈 차비가 없다는 친구들에겐 몇 푼 담아둔 서랍마저 탈탈 털어서 그들 손에 쥐어주곤 했었지요. 그런 날이면 내일엔 또 무엇으로 안주를 장만해 가게 문을 열까, 하늘 보고 신세 한탄하며 눈물짓던 때가 한두 번도 아니었답니다. 그래도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인지 한 번도 자긍심 버리지 않고 여태 살아왔네요.” 그랬다. 정관수 선생은 늘 자기 것들을 다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도 천주교 기동 공소 회장을 했으며 이후 청계 공소를 합치면 무려 17년 동안이나 공소 회장을 담임했다. 천성이 법이 없어도 살 분이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제일 먼저 달려간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정관수 선생 댁의 살림은 오롯이 여사님의 몫이었다. 그러던 1980년 3월 어느 날, 무안 경찰서에서 형사 몇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불순분자’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죄명으로 정관수 선생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됐다. 그 길로 끌려간 곳은 삼청교육대, 광주 31사단이었다. 당시 경찰서는 별의별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농민회를 조직하러 다닌다든지, 신협을 설립한다든지 하는 게 당시 경찰 눈에는 눈엣가시였으리라. 더군다나 그 일이 있기 달포 전 청계면 구로리에 거주하던 조병수라는 사람이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정관수 선생은 제일 먼저 경찰서로 달려가 크게 항의하지 않았던가. 이미 경찰에 미운털이 박힐 만큼 박힌 것이다. 그래도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했다. 남재희 신부님(현, 은퇴), 강우일 신부님(현, 주교), 그리고 윤공희 주교님(현, 대주교)까지 나서서 정관수 선생의 구명운동을 해주셨다.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지 한 달여 만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마터면 불귀의 객이 될 수도 있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집에 돌아온 기쁨도 잠시 정관수 선생은 또다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에 무안 천주교 신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판장을 돌려 서명을 받으며 구명운동에 발 벗고 나서니 정관수 선생은 일주일 만에 다시 풀려났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1년 드디어 가톨릭농민회 무안군 협의회가 창립되었다. 당시 정관수 선생은 38살의 나이로 가톨릭 무안군 농민회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선생의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생은 끝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닥칠 고난의 길은 아직 멀기만 한 것이었다. <계속> 기동마을 기동 공소에서, 정관수 선생은 27살부터 공소 회장을 담임했다. 청계 공소의 옛 터(청계면 도림리), 정관수 선생은 17년간 기동·청계 공소 회장을 담임했다. 강정마을 강정 공소 회장 정권진 선생을 추모하는 정관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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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의 맥을 잇는 청담 5대 정인수 명인(몽평요)을 만나다!분청사기의 맥을 잇는 청담 5대 정인수 명인(몽평요)을 만나다!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인화기법에 한평생 예술혼, 지금도 1300도 가마에 불태워 -무안 승달산 자락은 예로부터 분청사기의 고장으로 유명, 다양한 분청사기 도편들도 출토 (분청사기의 맥을 잇는 청담 5대 정인수 명인(몽평요)을 만나다) 편집 주 :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소서 절기였던 지난 7일 오후 2시 본사 발행인 박일훈 박사는 전남 무안군 몽탄면 신창길가에 위치한 ‘몽평요’로 분청사기 명인 정인수 선생을 찾았다. 분원 지정 도편수 전승계보를 보면 선생은 한기옥 도자기 장인과 더불어 청담 5대를 잇고 계신다. 청담 1대는 한영석 선생(조선시대 분원관요 도자장인), 청담 2대는 한치수 선생(조선시대 분원관요 도자장인), 청담 3대는 한상준 선생(도자기 장인), 청담 4대는 한창문 선생(도자기 장인)이다. 정인수 명인에게서 분청사기에 얽힌 사연들의 한 단면을 들어 보았다. 이번 호부터 본보 <남악 갤러리>(10면)에 정인수 명인의 분청사기 작품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정인수 명인과의 대담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발행인 :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명 인 : 아, 박 교수. 그래, 참 오랜만이오. 그간 잘 지내셨소? 발행인 : 네, 선생님. 그런데 선생님 존함을 정철수 씨로 알고 있었는데, 바뀌셨습니다. 명 인 : 그래요. 여러 세상 풍파를 겪으며 살다 보니 ‘철수’보다는 ‘인수’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웃음) 발행인 : 네, 선생님. 그런데 저는 분청사기를 미처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잘 모릅니다. 오늘 잠시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뵈었습니다. 먼저 분청사기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명 인 : 좋아요. 흔히 사람들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다 알아요. 하지만 분청사기 하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지요. 분청사기는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정선된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에 유약을 씌워 환원염에서 구운 조선 초기의 도자기를 말하는데, 분장회청사기라고도 해요. 발행인 : 좀 설명이 어렵습니다만, 그러면 우리 도자기가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에 분청사기가 생겨났다고 보면 되겠는지요? 명 인 : 그리 봐도 틀린 건 아녜요. 고려가 망하고 왕실 가마(지금의 강진, 부안 근처)에서 도자기를 굽던 장인들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죠. 조선이 개국하면서 각 지방에서 새로이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분청사기고요, 아쉽게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분청사기가 쇠락하고 말았어요. 그 빈 자리에 백자가 들어서게 됐다고 보면 맞지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분청사기 도자기 장인들이 수도 없이 많이 일본으로 끌려갔기 때문이었지요. 그 장인들에 의해 일본 도자기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는 사실은 박 교수도 들어서 알 거예요. 발행인 :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불현듯 비분강개한 마음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분청사기는 분장기법에 따라 다양한 특징들이 나타난다고 들었습니다만… 명 인 : 그렇죠. 분장기법을 발생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우선 일정한 무늬를 도장과 같이 만들어 그릇 표면에 찍은 뒤 백토분장하는 인화기법, 무늬를 선이나 면으로 파고 백토를 박아넣는 상감기법. 백토분장 뒤에 오목새김의 선무늬를 나타내는 음각기법, 무늬의 배경을 긁어내어 하얗게 무늬만을 남기는 박지기법, 분장한 후에 철사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기법, 귀얄이라는 시문도구를 이용하여 백토분장하여 나타나는 귀얄기법,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넣어 분장하는 담금분장기법(일명 덤벙기법) 등이 있지요. 발행인 : 아, 실로 다양한 분장기법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분청사기와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명 인 : 나는 아주 젊었을 때 일본 모 신문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요. 그때 우연히 우리나라 도자기를 접할 기회가 있었고 운명처럼 분청사기와 인연을 맺게 되었죠. 분청사기를 보면 뭐랄까, 마치 저잣거리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살아 숨 쉬는 냄새가 나고 왁자지껄한 느낌이 들어요. 그만큼 분청사기는 아주 서민적이고 향토색이 짙어요. 첫눈에 쏙 들어오지는 않아도 오래오래 보면 볼수록 두고두고 정이 드는 것이 매력이라고나 할까.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죠. (웃음) 내 나이 올해 74이니 벌써 48년을 흙과 불로 살아왔다고 보면 맞아요. 무안은 분청사기로 역사가 있는 고장이에요. 27살 나이에 타향인 무안군 몽탄면에 정착하면서 그해 5월 해방 이후 제1호로 무안 전통가마 ‘몽평요’를 만든 것이지요.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 스스로 ‘몽평요는 전남 도자문화의 산실이며 무안분청 중흥의 원천’이라고 감히 말하곤 한답니다. 발행인 : 네, 선생님은 일생을 분청사기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자부심은 당연하시고 또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십니다. 아까 여러 가지 분장기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주로 어떤 기법으로 분청사기를 빚으시는지요? 명 인 : 그동안 여러 기법을 다루어오다가 지금은 인화기법에 몰두하고 있어요.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꽃무늬를 찍다 보면 국화꽃이 자로 잰 듯 일직선으로 균일하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들쭉날쭉한 무늬가 되어 버리죠. 게다가 어떤 문양은 선명하고 어떤 것은 흐리고 삐뚤빼뚤 줄이 맞는 듯 살짝 틀어져 있는 것을 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나름 멋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중국의 화려한 문양이라든지 일본의 기계와 같은 정밀한 마무리 기술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조금은 거친 듯해도 보면 볼수록 수수하면서도 안정적인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지요. 발행인 : 네, 그러시군요. 제가 선생님과 관련한 자료들을 찾다 보니 지난 2020년 10월에는 ‘분청의 맥을 이어가는 계승자 3인전’을 서울 경인미술관에서 개최하셨더군요. 명 인 : 아, 맞아요. 스승인 청담 한창문 선생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제자들이 마련한 전시회였죠. 한창문 선생님은 여기 몽평요에서 1년 이상 기거하시면서 제게 분청사기의 많은 전통기법을 전수해 주셨지요. 그 전시회를 통해 분청사기가 갖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발행인 : 지난해 8월에는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소공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으셨더군요. 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끝으로 분청사기 명장으로서 선생님의 향후 계획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명 인 : 글쎄요. 앞으로 꿈이 있다면 분청사기를 널리 일반에 알리고 스토리와 영혼이 담긴 작품들을 좀 더 만들고 싶어요. 또 지난 40주년 기념전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채워주는 50주년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어요. 아마도 내 인생을 마무리하는 전시회가 될 것 같네요. 발행인 : 아닙니다, 선생님. 부디 옥체 강녕하셔서 60주년, 70주년 계속 전시회를 이어나가셔야지요.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분청사기장 정인수 명인) ◆분청사기장 정인수 명인 약력 1975년 몽평요 설립 1979년 목포 도자공예 강사 1982년 한국 전통예술대상전 초대작가 1997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1기) 2005년 대한명인(분청사기) 05-26호 2013년 세계명인 선정 대한명인회 부회장 10년 역임 현)세계명인회 대표단 고문 2021년 백년소공인 선정 1975~2011 개인전 10회/그룹전 17회/일본 교류전 10회 (인화문뚜껑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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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 세미나><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 세미나> 주최 : 양달사현창사업회, 후원 : 영암군 주제발표 : 1. 양달사 장군의 의병활동과 영암 의병활동의 계승 – 노기욱 호남의병연구소 소장 2. 영암 지역 왜구의 침입 경로와 영암선소의 중요성 – 정현창 전남대 전임연구웡 3.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 추진 방안 – 이영현 양달사 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종합질의토론 : 좌장, 김병인 전남대 역사학과 교수 김한남 영암문화원장, 김용철 전 동경대 연구원, 박일훈 전 초당대 교수(본지 발행인)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 세미나’ 기념촬영 지난 10일 영암교육지원청 시청각실에서 ‘제2회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 세미나’가 300여 명의 내외 인사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6월은 특히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리고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사람을 말한다면 곽재우 장군을 손꼽는다. 1592년 임진왜란을 기준을 보면 이것은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7년 전인 1555년 6,000여 명의 왜구를 실은 왜선 70여 척이 전라남도 남해안 쪽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 왜구들은 달량포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성을 포위하였으며, 어란도·장흥·영암·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이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구들을 섬멸하는데 큰 공을 세운 영암 지역 의병장들이 여럿 있었고 그중에서 양달사 장군이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인 을묘왜변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은 양달사 장군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세미나에서 밝혀진 큰 성과였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이 외에도 을묘왜변의 침입 경로와 염암성 대첩의 기념사업 추진 방안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우승희 영암군수 당선인은 축사에서 "의병장 양달사 장군에 대한 학술 세미나가 가지는 의미가 대단히 크다”고 격려한 뒤, "우리 고장 영암에 서려 있는 의병 정신을 오늘에 기려 앞으로 영암이 창대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군민이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제2회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 세미나’ 종합질의토론자 다음은 호남의병활동 조사·연구에 권위자인 노기욱 박사님의 주제발표 논문 ‘양달사 장군의 의병활동과 영암 의병활동의 계승’에서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 을묘왜변 전투와 관련해 대강을 알 수 있도록 발췌한 내용이다. 호남의병의 사표 양달사(梁達泗) 장군의 의병활동 노기욱 문학박사 주제발표(‘의병의 사표 양달사 장군의 의병활동과 영암의병 활동의 계승’)를 하는 호남의병활동 연구의 권위자 노기욱 박사 양달사[梁達泗, 1518년(중종 13)∼1557년(명종 12)]는 자가 도원(道源)이고, 호는 남암(南巖)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감역 양흥효(監役 梁興孝)의 증손이며, 주부 양승조(主簿 梁承祖)와 청주 한씨의 둘째 아들로 서기 1518년(중종 13년) 무인 2월 2일 영암군 도포면 봉호리 봉호정(鳳湖亭)에서 태어났다. 집에 있을 때는 효제(孝悌)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간(淸簡)으로 임하였다. 남달리 총명 출중하였고 용기가 뛰어나서 장래가 촉망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삼종숙(三從叔)인 양팽손(梁彭孫)의 문인이다. 지금의 화순군 도암면 월곡리에서 고향에 돌아와 시종면과 도포면 경계 아래 태산봉에 정자를 짓고 남암정이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는 무예에 능하고 학문 또한 성리와 경서에 통달했다고 한다. 1536년(중종 31)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544년(중종 39)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우우후(全羅左右虞侯)와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역임하였다. 1553년(명종 8)에 해남현감(海南縣監)에 부임하여 있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변에 직면하였다. 5월 11일 왜구들이 배 70척에 군사가 약 6천으로 서남해안 일대에 상륙하였다. 달량 권관 조세현(達梁權管 曹世顯)이이 왜구와 교전을 벌였다. ‘처음 왜선 십여 척이 달량진 해상에 발견되었으나 달량포와 이진포에 상륙할 때는 70여 척으로 성 아래 촌락은 약탈과 방화로 이어졌다. 이에 가리포첨사 이세린(加里浦僉使 李世麟)이 즉각 병사 원적(兵使 元績)에게 치보하자, 원적이 장흥 부사 한온(長興府使 韓蘊), 영암 군수 이덕견(靈巖郡守 李德堅) 등과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구원하려고 달량으로 달려갔다가 포위되었다. 5월 13일 달량이 함락되고 이덕견이 왜적에게 잡혔다. 왜적이 이덕견에게 서찰을 보내 군량(軍糧) 30섬을 요구했다. 이 급박한 달량진의 전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해남 현감 변협(邊協)이 포위된 것을 듣고서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달려갔다. 전 무장 현감 이남(茂長縣監 李楠)과 힘을 합쳐 접전하다가 적에게 격파되어, 이남은 죽고 변협은 패배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우도수사 김윤(右道水使 金贇)과 진도 군수 최린(珍島郡守 崔潾)은 변협이 패한 것을 알지 못하고 어란포에서 와 구원하다가 역시 패하여 달량이 함락되었다. 이에 양달사 장군은 "임금과 부모는 한 몸인데 어찌 예제(禮制)에 얽히어 소홀하게 할 것인가.”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빈 성에 들어가니 백성들이 감복하였다. 양달사 장군의 덕을 높이 사고 있던 고을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의병을 구성하였다. 공은 의병의 사표(師表)로 충효일체(忠孝一體)를 주창하며 상중임에도 구국에 앞장섰다. 형 양달수(梁達洙), 동생 양달해(梁達海) 및 양달초(梁達礎)와 더불어 장정 4천여 명을 규합하였다. 양달수는 형 양달사 장군과 창의하여 전공을 세우고 지평(持平)을 증직 받고 정려가 내려졌다. [중략] 양달사 장군은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 만호 박천추(萬戶 朴天樞)의 말을 빌려 타고, 왜구들을 동문 밖 영암읍 대신리 추더리[추다리; 金橋] 수렁으로 유인하였다. 당시 덕진만의 바닷물은 망호천과 대신리[대내: 배가 드나든 것에 연유된 마을 이름] 앞 추더리 다리를 거쳐 개신리 방아다리까지 드나들었다. 양달사 장군은 왜구들이 추격해오므로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하다가 금교(金橋)의 진흙탕에 이르러 말을 끼고 번쩍 뛰어넘었다. "호남읍지▶에서 양달사 장군은 ‘진흙 고랑으로 적을 유인하여 질탕한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라고 하였다. 양달사 장군의 계책으로 왜구들을 진흙 수렁에 빠뜨려 군사들과 섬멸한 것이다. 을묘왜변 당시 양달사 장군은 영암군민들에게 의병이 되길 권하고 그의 형제까지 의병으로 활약케 함으로 의병의 사표가 되기에 부족이 없었다. 공을 탐하지 않았던 그는 조선사회의 뜻있는 선비들은 공의의 표상으로 회자하였다. 5월 13일 달량성 함락으로 활개를 치던 왜구들은 5월 24일 영암성을 공격하였으나 양달사 장군과 영암군민의 선전으로 왜구들이 꺾이고 성안 장독샘 관정으로 음수 확보함으로 의병들이 더욱 사기가 충전되었다. 5월 25일 영암향교전투와 금교전투에서 승세를 거둠으로 왜구들이 퇴각하였다. 을묘왜변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제를 지키고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을 치료하였다. 그리고 미암 류희춘(眉巖 柳希春)을 방문하였다. 양달사 장군은 호남을 대표한 인물들과 교유하며 예제(禮際) 지키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적을 섬멸한 일에 기복(起復)하여 싸움터에 나선 것은 임금의 명에 따른 것이 아닌데 이에 상을 바란다면 이는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다.”고 하였다. 얼마 후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자, 고을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길 "우리 고을이 오늘을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양공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양달사 장군은 훌륭한 전공을 이루었지만 모친 상중이기에 포상을 극구 거절하여 다소 조명이 더디게 되었다. 그럼에도 1842년(경종 2) 5월 20일 영암 유림 김규성 등이 상소하고 의병의 사표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조정에서는 1847년(헌종 13) 10월 19일, 양달사 장군과 형제들에 대하여 양달사는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형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추증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관찬서인"전남도지(全南道誌)▶, "영암군지(靈巖郡誌)▶등과 "남암공사적(南巖公事跡)▶에서도 전공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 시대에 의병의 사표로 양달사 장군의 조명이 꾸준하게 진행되면서 영암군민의 역사적 정체성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7월 10일 영암읍 장독샘 현장에 양달사 장군의 공적비(功績碑)를 서예가 구철우(具哲祐)가 글씨를 쓰고 군민을 대표하여 영암군수 김기회(金基會)가 세웠다. 이어서 1973년 8월 25일 시종면 봉소리 조등 양달사 장군의 묘소에 묘비(墓碑)를 세웠다. 그리고 1974년 6월 양달사 장군이 시묘살이를 하였던 모친의 묘소 앞에 전남도지사 허련(許鍊) 등을 고문으로 정하고 영암군수 김연수를 위원장으로 추대하여 ‘호남창의영수양달사선생순국비(湖南倡義領袖梁達泗先生殉國碑)’를 건립하였다. 2019년 8월 22일 영암군은 장독샘, 도포면 시묘유적을 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하였다. 을묘왜변의 전란의 상황 속에서도 충효일체 사상을 실천한 양달사 장군의 의병정신은 대를 이어 계승되기에 충분하였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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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만평> "비극의 우크라이나" 장백산 화백<남악 만평> "비극의 우크라이나> 장백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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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갤러리> 분청사기 "한옥" 김문호 도예가<남악 갤러리> 분청사기 "한옥" 김문호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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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곤충 중 가장 큰 곤충 장수하늘소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곤충 중 가장 큰 곤충 장수하늘소 고대원시적 모습으로 살아가는 화석동물 현재는 광릉숲에서만 유일하게 서식 확인 분류 : 딱정벌레목 > 하늘소과 학명 : Callipogon relictus Semenov 천연기념물 제218호.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장수하늘소는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곤충 중 가장 큰 곤충이다. 중국 만주 동북부, 동부시베리아 우수리지방 및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분포되어 있다. 두부(頭部)와 상시(上翅)는 담황색, 전흉배는 흑색에 4개의 노란 반점이 있고, 몸통 옆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고 앞의 가장자리 끝의 톱니는 굵고 날카롭다. 지구 북구 북방 최대 종의 하나이며, 날개의 기부에는 돌출된 융기가 있는데 수컷은 암컷보다 더욱 발달 되었다. 수컷 성충은 꼬리에서 앞턱까지 보통 7∼8㎝ 정도이나 12.7㎝의 것도 발견되었다. 촉각도 수컷이 훨씬 길다. 유충은 서나무에서 서식하며 한 나무에 2∼3마리 또는 3∼4마리를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나무보다는 다소 썩은 나무에 산란한다. 산란 갯 수는 90여 개 정도이다. 유령의 유충은 많으나 최종령의 유충은 매우 희귀하다. 성충은 신갈나무 줄기의 혹같이 나온 부분에서 수액을 빨아 먹는데 암컷 한 마리에 수컷 3∼4마리가 모여들기도 한다. 장수하늘소는 서어나무 신갈나무 물푸레나무 등 적어도 수령이 백년 이상이 된 고목들로 구성된 극상 활엽낙엽수림에서만 생활한다. 성충은 6월에서 9월 사이에 다음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번식 즉 짝짓기를 위해 나타나고 알을 나무의 속피에 구멍을 뚫고 낳는다. 유충은 성충으로 성장하는데 적어도 3년애서 5년의 세월 동안 나무속에서 생활한다. 성충은 유충에서 고치(번데기)과정을 거쳐 변태하여 나무 밖으로 출현한 뒤 교미와 산란 등 번식을 위한 3개월이란 짧은 기간 삶을 살고 죽음을 맞이한다. 예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1930년대 후반 강원도 춘천시 북상면 추전리에서 4개체나 채집되어 그곳을 장수하늘소의 서식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여 왔으나, 전후 그곳에서는 자취를 감추어 1973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광릉의 임업시험장 중부지방 시험림인 소리봉(蘇利峰)에서 적지 않은 수가 채집되었으며, 강원도 명주군 청학동 소금강에서도 한 개체가 채집되기도 하였다. 특히, 광릉 소리봉의 서나무와 신갈나무숲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집단서식지가 될 것이며, 이 지역의 보호는 본종의 보존과 직결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장수하늘소에 속하는 종은 모두 9종이며 장수하늘소를 제외한 8종은 중남미 지역에 분포한다. 국내에서는 강원 춘천·화천·양구·강릉, 경기 포천, 서울 북한산 등지에 분포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광릉숲에서만 유일하게 서식이 확인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1968년 장수하늘소를 천연기념물 제218호로 지정했다. 곤충 가운데 처음이다. 환경부 역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했다. 종적을 감춘 장수하늘소는 2006년 암컷 한 마리가 광릉숲에서 관측됐다. 이후 다시 관찰되지 않다가 2014년부터 매년 1∼3마리가 발견되고 있다. 국립수목원에서 현지 내 증식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대원시적 모습으로 살아가는 장수하늘소가 살아가는 극상의 활엽수림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 되는 생태계의 아름다운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하면서 글을 마친다. 사진출처 환경부국립생물자원관 장수하늘소 산란모습 사진출처 환경부국립생물자원관 장수하늘소 유충 사진출처 환경부국립생물자원관 장수하늘소 교미모습 사진출처 환경부국립생물자원관 장수히늘소 좌 수컷 우 암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