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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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울강의 - 동학농민혁명기념일 특별 강연<iframe width="1280" height="720" src="https://www.youtube.com/embed/xPqd6hxxldU"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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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보평산의 물량성을 오르다.<iframe width="1019" height="573" src="https://www.youtube.com/embed/mRULt8n30D8"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찾아가도 안내 팻말 하나 없어 아무도 모르고, 알려 하지도 않는, 그래서 잊혀진 성 보평산의 물량성을 오른다. 무안읍 고절리와 용월리 그리고 매곡리에 걸쳐 있는 보평산(225m) 물량군의 옛 성터 란다. 물량성이라 아니 나는 면주성이라 부르고 싶다. 발아래 국제공항이 더 멀리로는 신안의 모든 바다와 섬, 그리고 빙 둘러 목포 영암 강진 나주며 함평까지 북으로 영광의 칠산대교도 함해만을 사이에 두고 이 성의 호위무사가 된다. 천혜의 요충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평산고성(普平山古城)은 (무안현의)서북쪽으로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은 옛터가 있는데 세상에서 물량시(勿良時) 옛터라고 전한다.”라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은 토성 150m와 또 그만큼 길이의 돌로 쌓은 석성을 쉽게 볼 수 있다. 토성의 가장 높은 곳에는 각 통신사의 기지국 철탑이 문명의 위대함을 서로 경쟁이라도 하려는듯 우뚝 서 있고, 철조망 옆 접근금지라는 팻말은 천 년 전에 번을 서던 병사의 놀란 외침이 되어 들려 온다. 물량은 고려 2대 혜종이 즉위하고 부르던 무안군의 엣 이름이다. 고려 성종때 다시 나주목 무안군이 된다. 오늘 역사의 이런 저런 편린들을 모아 수 많은 지난 일들을 반추하며 두 천년을 지켜온 성벽 위를 걷는다. 저 능선 너머로 고라니 한 쌍이 힘차게 달려 간다. 생명력 가득한 자연의 역동성 이다. 멋진 s 라인 공항고속도로 위에도 자동차의 행열이 가득 하다. 자태고운 저녘노을도 이 풍경속에 넣어 달라 아우성이다. 이 멋진 순간 나는 성의 주인이 된다. 아! 나의 성 물량성! 보평산성이여! 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호령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오늘 내일 그리고 또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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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속에서 만날수 있는 영광군수 이현익휼민선정비 보수가 시급하다.해제면 광산리 발산마을 입구 이현익 선정비는 속칭 비석골이라 부르는 곳에 있다. 이 비는 군수인 이현익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동치 4년(1865년)에 건립한 것이다. 전면에 "군수이현익휼민선정비"라 명문 되어 있다. 비의 규묘는 높이 220 cm 폭50cm 두께 20 cm이다. 1896년 지도군의 초대군수 오횡묵이 광주를 가면서 쓴 지도군총쇄록에도 소개가 되어 있어 이곳이 당시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길목이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방치 되어 있어 정비가 필요하여 여기에 올린다 이현익은 순조27년(1827년) 정해년에 한양에서 태어 났다. 자는 덕재(德在) 본관은 연안이다. 부는 이증우(李曾禹) 조부는 이인수(李麟秀) 증조부는 이조원(李肇嫄) 이다. 철종5년(1854년) 28세에 갑인정시에 병과7위로 급제하였다. 1867년(고종 4) 4월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으며, 1869년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1871년에는 승정원 예방승지(禮房承旨), 1873년 우승지가 되었다. 1875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1882년에는 좌승지로 근무하였다. 1883년 특별 발탁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거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84년에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886년에는 예조판서, 1889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0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재차 예조판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9년에는 정2품으로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현익(李玄翼))] <iframe width="1280" height="720" src="https://www.youtube.com/embed/-Cdxbk827Cs"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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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의장 무안군수 출마 선언식김대현 무안군의회의장 무안군수 출마선언 김대현 무안군의회의장이 오는 6월 1일 실시되는 지방선거에 무안군수 출마를 선언하였다. ‘새로운 미래! 희망찬 무안!“을 선언하면서 10개의 약속도 발표 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간예산 1조원 시대 인구 10만명 시대를 열겠습니다. 우리 농촌을 생산-유통-관광이 어우러진 6차산업의 중심으로 만들겠습니다. 새로운 해양시대를 개척 하겠습니다. 남악. 오룡지역을 교육문화특구로 육성 하겠습니다. 행정조직을 효율적으로 정비하고 군민이 묻고 군수가 답하는 투명한 행정문화를 만들겠습니다. 멋과 맛이 어유러진 풀뿌리 문화관광 1번지를 구현하겠습니다. 모든 세대가 편안한 일상을 살아갈수 있는 정주여건을 조성하겠습니다. 인공지능(AI) 집적단지를 조성해 4차 산업혁명시대를 선도하겠습니다. 한공 관련사업(MRO)과 항공물류 거점기지를 구축하겠습니다. 청년수당을 지급하고 청년일자리 창출에 앞장서겠습니다. <iframe width="1280" height="720" src="https://www.youtube.com/embed/qt1x_EhbRg8"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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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읍 천년고찰 약사사를 찾아가다.<iframe width="1280" height="720" src="https://www.youtube.com/embed/QKEBMWzzZUU"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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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남산의 정자 남산정<iframe width="1280" height="720" src="https://www.youtube.com/embed/03geo7dL65M"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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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새해 일출을 보면서<iframe width="1280" height="720" src="https://www.youtube.com/embed/UeOt06VlrDQ"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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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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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의 날 기념식 김영록지사 격려사<iframe width="1228" height="691" src="https://www.youtube.com/embed/FpH7bmWd0i0"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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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이중망암(望庵) 변이중 선생은 장성 출신으로 이율곡 성우계 선생의 문인이다. 28세에 문과 급제 하여 이조, 호조좌랑 예조, 형조정랑, 군기중부시정과 외직으로는 황해도 평안도 도사, 풍기 함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중하고, 전라도 소모사와 조도어사를 두 번, 독운사를 3차례나 역임하며, 전란을 평정하는데 진력하여 호성원종 1 등과 선무원종 2 등공신이 되었다. 특히 왜군의 조총을 무력화시키는 변이중 화차 300량을 자비로 창제하여 국방과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조선 중기의 성리학을 경세적 실천으로 전환한 후기 실학자에 가교 역할을 하였다. 또한 본인이 수 천의 군사를 이끌고 양천에 배수진을 치고, 자신이 직접 감독 제조한 화차 40량을 권율장군에게 보내 최전선에서 최정애 공격진의 예봉을 방어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행주대첩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선생이 66세에 돌아 가시자 조정에서는 이조참판으로 증직하고,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월사 이정구 선생은 묘갈명 해서 "저들은 치달려도, 이분은 뒤졌으며, 헐뜯고 모함 할 수록, 더욱 온전 하셨도다. 얕잡아 보려 해도, 타 넘지 못하고, 더럽혀 보려 해도, 깎아내리지 못했네. 훌륭한 행실은 가정에 쌓았으나, 세상은 이를 용납하지 아니 했고, 수고로움 나라에 베풀었으나, 쓰임을 보지는 못 하셨도다. 마침내 뜻 못 이루고 돌아가시니, 아 이것이 하늘의 운명인가!" 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