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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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만능주의’를 경계한다인간은 왜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까? 순자의 성악설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면 사회적으로 큰 해악을 끼치게 되므로 교육을 통해서 악한 마음을 순화시켜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심리학자 G.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는 대부분 무의식에 지배되어 자신의 원초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이 아니더라도 범죄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은 인간의 범죄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환기시킨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를 모두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법의 온도는 과연 몇 도쯤 될까? 차가울까 따뜻할까? 아니면 그 중간쯤일까? 동·서양에 걸쳐 훌륭한 법언(法諺)들이 많이 존재하고 치열한 법리적 논의가 진행되지만 아무리 뛰어난 법학자라도 법의 온도에 대한 답을 딱부러지게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는 그만큼 법의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증거가 아닐까. 복잡다단한 사회현상을 일거에 재단할 수 있는 법이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법과 징벌의 관계를 두부모 자르듯 한 치 오차도 없이 정량적으로 적용하기도 어렵다. 동일한 범죄라도 범죄가 발생한 정황이나 범죄인의 정상(情狀)에 따라 그 형량은 천차만별하므로 법의 문제는 결코 간단치가 않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존의 법률을 개폐하거나 새롭게 법을 제정하는 일도 최대한 세밀하고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졸속으로 처리된 법률의 피해는 결국 고스라니 사회구성원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우려를 넘어 이른바 ‘법의 과잉’은 더욱 큰 문제다. 법치주의라는 미명 아래 모든 일을 법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법의 존재 이유와도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근원적으로 선도가 목적이지 징벌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대한한국의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일반에서도 고소 고발이 남발되고 만연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그럴수록 법 만능 현상만 더욱 심화될 뿐 법의 선도적 기능은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의 여러 주법(州法)을 살펴보면 일반의 상식을 뒤엎는 법률이 실제로 상당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음정이 맞지 않은 노래를 부르면 위법이다(노스 캐럴라이나주)/문상객은 세 개 이상의 샌드위치를 먹을 수 없다(미시건주)/미혼 여성이 혼자 낚시질을 해서는 안 된다(몬타나주)/선인장을 자르면 25년 형에 처해질 수 있다(애리조나주) 등등. 믿기 어렵지만 이 법률들은 모두 사실이다. 물론 이런 법률이 제정된 배경을 무시하고 실소를 터뜨리는 것은 법제정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싶지만 웃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법치국가라고 미국을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솔직히 미국은 범죄 다발 국가로 명성이 높고 법이 없으면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나라가 아닌가 말이다. 과연 세상의 모든 현상을 법으로 재단하고 규제할 수 있을까?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독일의 법철학자 엘리네크(Jellinek)의 유명한 법언도 있듯이 법을 만능으로 여기는 것은 법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오만이다. 한편으로 법의 과잉도 문제지만 중국의 경우 반사회부패법 등이 징벌보다는 일부 권력다툼의 도구로 쓰이는 것 또한 법의 본질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나아가서 창의적이고 고유한 지적재산권을 함부로 침해하는 행위를 방지하는 법률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지포라이터 뚜껑을 열 때 발생하는 ‘딸깍’하는 소리나 도무지 주인이 따로 없을 것 같은 새의 울음소리, 심지어는 일부 특정 음식의 냄새까지도 상표법으로 규제하고 있다니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다. 위조지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경제를 왜곡시킬 수 있는 범죄이므로 강력한 처벌이 요구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20세기 초 미국의 “1달러짜리 위폐범” 이야기는 법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오갈 데 없는 노인은 빵을 구하기 위하여 어릴 적의 그림그리기 실력으로 1달러짜리를 위조했다고 한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가게 주인은 그것이 위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인에게 빵과 우유를 주었고 그 노인은 결국은 당국에 기소되었으나 생계형 범죄로 인정되어 벌금 1달러를 선고받았다고 한다. 매우 가슴 따뜻한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진 함무라비법전 이전에 티베트고원 북쪽에 존재한 우르국에는 재미있는 법이 하나 있었다. 즉, “하인이 주인과 동급 행세를 하면 하인의 입을 소금으로 문지른다.”는 징벌이 그것이다. 이 법은 가혹하기는커녕 매우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하인의 엄청난 불경죄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소금으로(영어 ‘salary’는 ‘salt’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하인의 입을 문질러준다니 역설적이게도 얼마나 고마운 은혜인가! 소금으로 입안의 소독도 되고 지독한 코로나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는 법학을 충분히 철학의 범주에서 다를 수 있다는 하나의 작은 예가 될 수도 있겠다. 자칫 지나치게 규제 일변도의 법률(law)을 보다 따뜻한 법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법이 사회구성원의 건전한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더욱 고양시켜 국민들 스스로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는(low) 이상사회를 꿈꿀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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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이 그립다2021년 새해가 밝자마자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전직 두 대통령 사면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국민 사이에 논쟁이 뜨겁다. 여당과 야당 안에서도 각기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을까. 이 문제를 앞에 놓고 보니,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의 큰 정치가 새삼 그리워진다. 김대중 대통령은 용서와 화합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독재에 맞서서 자유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가장 용감히 싸웠다. 그래서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납치돼 현해탄에서 죽을 뻔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은 무고한 김대중을 5.18의 배후 주동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다행히 미국이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감형을 요구해 김대중은 살아났다. 이렇게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군사 독재 정권에서 김대중은 가장 핍박받고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그는 1998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자마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의 사면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그리고 1999년에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박정희 기념 도서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08억 원까지 지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다. 그가 남북 관계 개선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을 용서한 것도 그에 못지않은 큰 덕이다. 김 대통령은 재임 5년간 해마다 1년에 두 차례씩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원로로서 대우했다. 지금도 전두환 내외는 김 대통령 때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가장 잘 대접받아서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때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모여서 화기애애하게 나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하면 우리나라에도 보도된다. 그러면 한국 국민들은 “우리도 저러면 좋겠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때 이미 우리도 그런 행사를 치른 역사가 있다. 대한민국에도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들이 모여 환담하며 함께 나라 일을 걱정한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건국 이래 70년이 넘는 역사에서 오직 김대중 대통령 때만 있었다. 그 외 다른 대통령들은 전직 대통령들을 모두 탄압했다. 박정희 소장은 5.16 쿠데타로 윤보선 대통령을 쫓아냈다. 전두환 소장은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하여 대통령 자리를 빼앗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에 넣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전혀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 경상도 군사 정권은 30여 년간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를 독점하면서 호남인을 소외시켰다. 그 시대를 살았던 호남인이라면 그 설움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정치 보복을 하고자 하면 누구보다도 김대중 대통령이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으로 나라를 하나로 만들었다. 국가 부도로 인한 경제난을 금 모으기 운동으로 온 국민을 하나로 뭉쳐서 극복하게 이끌었다. 인재도 지역 차별 없이 골고루 등용했다. 이렇게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화합의 정치를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러했음에도 후임 대통령들은 이전 대통령들처럼 다시 전직 대통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남북회담의 금전 제공을 빌미로 특검을 했다. 결국 박지원 비서실장이 김 대통령 대신 감옥 갔다. 그 뒤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이 퇴임하자마자 검찰에 불러서 수사하여 모욕을 주었다. 결국 노 대통령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을 가장 잘 이은 사람이다. 이명박을 탄압하지 않았다. 또 아버지를 용서해준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 감사를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달랐다.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서 내쫓았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 뒤에도 취임하면서부터 ‘적폐 청산’이라면서 수많은 전 정권 사람들을 수사하고 잡아가두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네 명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명박 대통령까지 결국은 감옥에 가두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았다. 미래를 보고 국가의 장래에 대비했다. 금지돼 왔던 일본 문화를 개방해서 한국 문화의 체질을 강화했다. 그 기틀 위에서 한국 문화가 발전해서 지금 한류가 있게 된 것이다. 또 정보통신부를 만들어서 전자 강국의 기틀을 다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작한 의료보험을 김 대통령은 지금의 전 국민 보험으로 완성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다. 오직 우파 정권 10년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만 매달리고 있다. 그렇게 전 정권 수사할 때는 검찰을 수족처럼 잘 부려먹었다. 윤석열 검사는 그때 박근혜 대통령을 수사한 책임자였다. 그 공으로 서울 지검장에 이어 검찰총장까지 벼락출세했다. 그때까지는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 개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윤 검찰총장이 조국 법무장관을 수사하자, 그때부터 문 대통령은 뜬금없이 ‘검찰 개혁’을 주장했다. 왜 전 정권 수사할 때는 잘했다고 “우리 윤석열 검찰총장”이라고 칭찬하더니, 현 정권을 수사하니 갑자기 말을 바꾸는가. 이런 앞뒤가 안 맞는 검찰 개혁이 무슨 명분이 있고 당위성이 있겠는가. 아무리 추미애를 법무장관 시켜서 윤 총장을 탄압하고 징계하고 야단법석을 해봤자 결국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윤석열을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키워주는 반작용만 낳았다. 현재 나라가 매우 어렵다. 문 대통령이 조국 법무장관 임명 때부터 오로지 지지자들만을 위한 정치를 하여 나라를 완전히 둘로 분열시켜 버렸다. 또 경제도 코로나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최저 임금을 급격히 인상하여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있다. 더군다나 부동산 정책을 잘못 펴서 집값만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 이렇게 지금 정치도 경제도 모두 아주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이낙연 민주당 당대표가 국민 화합을 꾀하고자 두 전직 대통령 사면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대해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두 전직 대통령의 반성을 요구하며 반대한다. 하지만 그들이 김대중을 죽이려 했던 박정희, 전두환만큼 무슨 큰 죄를 지었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두환도 조건 없이 용서했는데, 왜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를 탄압한 적도 없는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엄동설한에 그들을 감옥에 가둬두는 건 인도적으로나 국가의 체면으로나 옳지 않다. 미국은 전 정권에서 잘못된 일은 제도를 개선하지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정치 보복의 악순환은 국가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 당사에는 김대중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분의 사진만 걸지 말고, 그분의 용서와 화합 정신을 배우기 바란다. 그 정신을 배웠다면 적폐 청산한다고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고 미래에 대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지자들만 보지 않고 국민 전체를 보면서 포용과 화합의 정치를 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만이라도 김대중 대통령을 본받아 큰 정치를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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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이 그립다큰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이 그립다 2021년 새해가 밝자마자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전직 두 대통령 사면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국민 사이에 논쟁이 뜨겁다. 여당과 야당 안에서도 각기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을까. 이 문제를 앞에 놓고 보니,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의 큰 정치가 새삼 그리워진다. 김대중 대통령은 용서와 화합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독재에 맞서서 자유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가장 용감히 싸웠다. 그래서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납치돼 현해탄에서 죽을 뻔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은 무고한 김대중을 5.18의 배후 주동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다행히 미국이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감형을 요구해 김대중은 살아났다. 이렇게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군사 독재 정권에서 김대중은 가장 핍박받고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그는 1998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자마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의 사면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그리고 1999년에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박정희 기념 도서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08억 원까지 지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다. 그가 남북 관계 개선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을 용서한 것도 그에 못지않은 큰 덕이다. 김 대통령은 재임 5년간 해마다 1년에 두 차례씩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원로로서 대우했다. 지금도 전두환 내외는 김 대통령 때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가장 잘 대접받아서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때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모여서 화기애애하게 나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하면 우리나라에도 보도된다. 그러면 한국 국민들은 “우리도 저러면 좋겠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때 이미 우리도 그런 행사를 치른 역사가 있다. 대한민국에도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들이 모여 환담하며 함께 나라 일을 걱정한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건국 이래 70년이 넘는 역사에서 오직 김대중 대통령 때만 있었다. 그 외 다른 대통령들은 전직 대통령들을 모두 탄압했다. 박정희 소장은 5.16 쿠데타로 윤보선 대통령을 쫓아냈다. 전두환 소장은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하여 대통령 자리를 빼앗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에 넣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전혀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 경상도 군사 정권은 30여 년간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를 독점하면서 호남인을 소외시켰다. 그 시대를 살았던 호남인이라면 그 설움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정치 보복을 하고자 하면 누구보다도 김대중 대통령이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으로 나라를 하나로 만들었다. 국가 부도로 인한 경제난을 금 모으기 운동으로 온 국민을 하나로 뭉쳐서 극복하게 이끌었다. 인재도 지역 차별 없이 골고루 등용했다. 이렇게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화합의 정치를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러했음에도 후임 대통령들은 이전 대통령들처럼 다시 전직 대통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남북회담의 금전 제공을 빌미로 특검을 했다. 결국 박지원 비서실장이 김 대통령 대신 감옥 갔다. 그 뒤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이 퇴임하자마자 검찰에 불러서 수사하여 모욕을 주었다. 결국 노 대통령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을 가장 잘 이은 사람이다. 이명박을 탄압하지 않았다. 또 아버지를 용서해준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 감사를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달랐다.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서 내쫓았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 뒤에도 취임하면서부터 ‘적폐 청산’이라면서 수많은 전 정권 사람들을 수사하고 잡아가두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네 명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명박 대통령까지 결국은 감옥에 가두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았다. 미래를 보고 국가의 장래에 대비했다. 금지돼 왔던 일본 문화를 개방해서 한국 문화의 체질을 강화했다. 그 기틀 위에서 한국 문화가 발전해서 지금 한류가 있게 된 것이다. 또 정보통신부를 만들어서 전자 강국의 기틀을 다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작한 의료보험을 김 대통령은 지금의 전 국민 보험으로 완성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다. 오직 우파 정권 10년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만 매달리고 있다. 그렇게 전 정권 수사할 때는 검찰을 수족처럼 잘 부려먹었다. 윤석열 검사는 그때 박근혜 대통령을 수사한 책임자였다. 그 공으로 서울 지검장에 이어 검찰총장까지 벼락출세했다. 그때까지는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 개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윤 검찰총장이 조국 법무장관을 수사하자, 그때부터 문 대통령은 뜬금없이 ‘검찰 개혁’을 주장했다. 왜 전 정권 수사할 때는 잘했다고 “우리 윤석열 검찰총장”이라고 칭찬하더니, 현 정권을 수사하니 갑자기 말을 바꾸는가. 이런 앞뒤가 안 맞는 검찰 개혁이 무슨 명분이 있고 당위성이 있겠는가. 아무리 추미애를 법무장관 시켜서 윤 총장을 탄압하고 징계하고 야단법석을 해봤자 결국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윤석열을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키워주는 반작용만 낳았다. 현재 나라가 매우 어렵다. 문 대통령이 조국 법무장관 임명 때부터 오로지 지지자들만을 위한 정치를 하여 나라를 완전히 둘로 분열시켜 버렸다. 또 경제도 코로나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최저 임금을 급격히 인상하여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있다. 더군다나 부동산 정책을 잘못 펴서 집값만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 이렇게 지금 정치도 경제도 모두 아주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이낙연 민주당 당대표가 국민 화합을 꾀하고자 두 전직 대통령 사면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대해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두 전직 대통령의 반성을 요구하며 반대한다. 하지만 그들이 김대중을 죽이려 했던 박정희, 전두환만큼 무슨 큰 죄를 지었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두환도 조건 없이 용서했는데, 왜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를 탄압한 적도 없는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엄동설한에 그들을 감옥에 가둬두는 건 인도적으로나 국가의 체면으로나 옳지 않다. 미국은 전 정권에서 잘못된 일은 제도를 개선하지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정치 보복의 악순환은 국가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 당사에는 김대중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분의 사진만 걸지 말고, 그분의 용서와 화합 정신을 배우기 바란다. 그 정신을 배웠다면 적폐 청산한다고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고 미래에 대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지자들만 보지 않고 국민 전체를 보면서 포용과 화합의 정치를 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만이라도 김대중 대통령을 본받아 큰 정치를 하기 바란다. 金昌辰(논설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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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궁극적 역할과 의미문의 궁극적 역할과 의미 윤창식(논설위원, 독문학박사) 유년시절 시골의 오일장터에는 서커스판이 곧잘 펼쳐지곤 했다. 서커스 장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언뜻 허름해보였으나 첫 출입구를 지나서 무대 앞으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구간마다 여러 개의 문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 꽤 충격을 주었다. 물론 커다란 통나무 기둥에 두꺼운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진 대여섯 군데의 문들은 불법 입장객을 막을 요량이었을 터이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법 앞에서>라는 단편에서 문의 상징성과 본질에 대한 강렬한 암시를 하고 있다. 주인공인 시골남자는 법문(法門) 앞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에게 문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다. 하지만 시골남자는 끝내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임박해서야 문지기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소. 이제 문을 닫아야 겠소.” 매우 난해해 보이는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각종 이념이나 규율 혹은 허위의 문 안에 스스로 유폐되어 자신을 옥죄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고언으로 들린다. 작품세계가 아니더라도 인간 세상에는 문하나 때문에 목적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영어로 ‘입장료’를 뜻하는 ‘admission fee’와 ‘입장무료’에 해당되는 ‘admission free’ 사이에는 자음(r) 하나 때문에 정반대가 되는 미묘함이 있다. 이는 언어미학적으로 무엇을 함의하는가? 입장시키는 문과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문이 본래 하나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아가서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카프카의 <성>(城)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인은 인간적 실존을 상실한 채 저마다 자본과 탐욕이라는 거대한 성문에 갇혀 허둥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 작가 존 파울즈의 <콜렉터>는 나비 수집을 하는 남자주인공이 대낮에 여대생을 납치하여 자기만의 골방에 가두어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남자는 결코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 그녀의 모든 모습을 기록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여기서 유명한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특이한 심리적 메커니즘의 단초가 형성된다. 갇힌 여성이 나중에는 남자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문의 궁극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은 닫혀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열려 있다는 혹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당연히 문은 열리고 닫히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지만 문의 궁극적인 역할은 열리는 데 있는 게 아닐까. 만약 문의 최종적 기능이 닫히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문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독일어 ‘Tor’는 ‘대문’과 ‘바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는 입을 항상 벌리고 다닌다는 바보를 큰 대문에 비유하여 언어적으로 비하하고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역설적이긴 하지만, 흔히 바보로 칭해지는 이들의 얼굴 표정에 그다지 큰 고통은 서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른바 열림과 수용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들이 있다. 감옥의 문, 군대 위병소의 문, 업무가 끝나고 잠긴 사무실 문, 공동경비구역의 남북을 가로 막는 판문점의 문 등등, 어찌되었건 닫혀있는 문은 일시적일 뿐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영원히 닫힌 문이 세상에 있을까? 혹 연옥문이나 지옥문 정도면 모를까, 닫혀 있어도 언젠가 열려야 할 문들은 많다. 자본주의의 문과 사회주의의 문은 어떻게 다를까?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수많은 장벽과 문들, 이념과 이권으로 단단히 뭉쳐진 굳건한 문들, 사실 한 끗 차이로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장난 같은 세상의 문들을 어찌해야 할까? 사실 사회의 규범이나 국가 및 공공기관이 제정한 각종 규칙과 명령 혹은 법령 등은 단순히 규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사회구성원들을 선도하기 위한 도구나 목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규제나 차단만을 위해 법의 문턱을 만든다면 진정한 법의 취지를 몰각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제는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손으로 숫자를 누르고 카드키를 갖다 대는 것도 귀찮아서 지문 인식으로 들어가고 싶은 문을 따고 유유히 통과하기도 한다. 손가락 지문이 문고리 권력을 행사하는 꼴이다. 지문은 원천적으로 위조가 불가능하므로 몽둥이를 들고 서서 문을 지킬 필요가 없기에 디지털 방식은 간단히 불법 입장객을 막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효율과 편리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사람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정(情)의 문까지 닫혀버릴까 적잖이 우려되기도 한다. 60여 년 전 유년시절에 보았던 서커스 곡마단패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여전히 잘 열리지 않는 인생의 숱한 문들을 곡예처럼 넘나들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도 열려라 참깨(!) 식으로 편리한 숫자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세상이 참되게 깨어나서 좀 더 평화스러워 지려면 모두들 문을 너무 굳게 닫지는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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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통합과 무안반도 통합광주·전남 통합과 무안반도 통합 김창진 문학박사 11월 2일, 광주광역시 이용섭 시장과 전남 김영록 도지사가 '광주·전남 행정통합 논의를 위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광주전남 통합'이 본격 논의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왜 광주와 전남은 통합하려는 걸까. 현재 서울·인천·경기의 수도권에 대한민국 인구의 50%인 2,500만 명이 산다. 그러니 정부는 모든 정책을 인구가 많은 수도권 위주로 펼쳐나가지 않을 수 없다. 지방은 인구가 적으니 홀대를 당해도 발언권이 없다. 거대 수도권에 맞서서 광주와 전남이 살아남으려면 인구를 늘려 힘을 키워야 한다. 광주와 전남이 서로 나뉘어 지금처럼 각자도생하려다가는 함께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부산·울산·경남(부울경), 대구·경북, 대전·세종 등 타 지역들도 초광역권으로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와 전남은 앞으로 광주전남연구원 용역 1년, 검토·준비 기간 6개월을 거친 뒤 공론화위원회를 공동 구성하고 민간 주도, 상호 존중 기조 속에 최선의 방안을 도출하는 대원칙을 지켜나가기로 했다. 광주와 전남을 합칠 경우 인구가 328만 명이 된다. 그래도 부산광역시의 355만 명보다는 작다. 다만 경남의 330만 명과 비슷해질 것이다. 물론 광주·전남 통합이 '상생 발전'이라는 장밋빛 전망만 있는 건 아니다. 통합 이후 모든 게 광주로 쏠리는 '광주시 블랙홀' 현상이 나타날 우려도 있다. 또 통합 지자체에서 기존의 광주와 전남 간의 인사·재정권 재조정에 따른 힘겨루기,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 자리가 줄어드는 공직사회의 반발 등 예상되는 걸림돌도 많다. 하지만 인구는 계속 줄어드는데, 지금처럼 광주와 전남이 분리되어 있으면 점점 더 힘이 약해질 게 뻔하다. 통합은 옳은 방향이다. 다만 대책을 잘 세워 후유증을 최소화해야 한다. 광주 전남 통합 움직임을 보면서, 과거 몇 번 시도했다가 무산된 목포· 무안·신안 통합이 떠오른다. 통합이 무산되면서 목포(22만)는 인구가 여수(28만), 순천(28만)에 밀려 전남 3위의 도시로 전락했다. 만약에 광주·전남 통합이 될 경우, 목포·무안·신안 각자의 운명은 지금보다 더 열악해질 것이다. 전남에서도 밀리는데 광주의 區(구)들에 비하면 더 밀리지 않는가. 서열이 한참이나 밀려서 존재감이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도 목포·무안·신안은 지금도 그대로 각자도생을 꾀할 것인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과거 伽耶(가야)는 철기 문화가 뛰어난 나라였다. 그런 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했다. 6가야가 연맹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통일된 왕국을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에 각개 격파당한 것이다. 목포·무안·신안도 각자 그런 운명을 겪게 될 우려가 크다. ‘인구소멸지도’라는 게 있다. 한국 인구가 줄어들어 지자체가 소멸할 위험도를 나타내는 지도이다. 그 지도에서 2020년 현재 목포는 ‘주의’ 지역이며, 무안과 영암은 ‘위험’ 지역이다. 신안은 가장 심각한 ‘위기’ 지역이다. 신안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그 다음은 무안·영암이며, 목포는 가장 오래 간다. 즉 앞으로도 도시인 목포는 생존할 가능성이 크지만 군단위인 신안·무안·영암은 생존이 위태롭다.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맞을 것인가. 광주와 전남이 통합되면 가장 경쟁력이 있는 지역은 물론 광주시 안의 각 구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여수·순천·광양권이다. 인구도 많고 공단도 크며 경제력도 좋다. 근래 전남에서 가장 발전하는 쪽은 그 동남권이다. 목포·무안·신안의 서남권은 인구도 적고, 공단도 작고, 경제력도 약하다. 지금 이대로 있으면 통합된 광주·전남 지자체에서 서남권 지자체들은 갈수록 낙후될 게 뻔하다. 전남 서남권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목포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등치를 키우고 인구를 늘려야 한다. 목포·무안·신안에 영암까지 통합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목포·무안·신안은 원래 무안군에서 갈라져 나왔다. 광주·전남 통합처럼 원래대로 돌아가 통합하는 게 순리다. 영암은 영산강 하구언과 목포대교로 목포와 이어져 있어 목포와 같은 생활권이다. 합치는 게 합리적이다. 목포·무안·신안·영암이 통합하면 인구가 40만 명을 넘는다. 그러면 광주의 구들과 맞설 수 있다. 만약에 거기에 해남·진도까지 더한다면 50만 명이 넘어서 통합 광주·전남에서 최고 도시가 될 것이다. 그러면 통합 광주·전남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그게 서남권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 목포와 무안·신안·영암을 통합하자. 인구와 힘을 키워야 통합 광주·전남에서 발언권이 커진다. 작은 지자체들이 통합해 큰 지자체를 만들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미래에 통합된 무안반도가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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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청은 도청소재지 남악을 발전시켜라!전남도청은 도청소재지 남악을 발전시켜라! 유재길 전남도는 도청청사가 들어설 무안군 남악지역 3백6십3만평을 헐값에 사들여 도청을 짓고 택지개발 조성공사 (총사업비 5천4백10억원)를 하여 매매 개발이익금을 약 1백 5십억원을 남긴 바 있다. 수많은 전남도 산하기관이 들어오고 아파트 등 택지가 만들어져 현재 3만 3천명이 입주했고, 바로 옆에 전남도가 택지개발중인 오룡 지구가 내년 7월 1단계가 준공되고, 2단계가 준공되어 입주하게 되면 2만5천명의 인구가 유입되어 전남도청 소재지 남악과 오룡을 합쳐 총 5만 8천명의 소도시가 형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도청소재지에는 야구, 축구, 육상경기를 할 수 있는 공설운동장, 시내시외버스터미널, 청소년 및 노인복지회관 등 도시 기반생활 편의시설이 전무한 상태다. 심지어 학교시설 용지가 없어 초등학교를 신설하지 못해 학생들이 과밀학급에 시달리며 무안군에서는 주민 숙원사업인 실내수영장을 건립하려해도 마지막 남은 체육시설 1필지가 전남도 소유로 되어 있어 예산이 열악한 무안군에서는 부지를 살 수 없어 실내수영장을 못 짓고 있는 실정이다. 전남도가 무안 땅에 택지개발 조성공사로 거액의 개발이익을 냈으니 마지막 남은 체육시설부지 1 필지라도 무안군에 양도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전남도는 오룡지구 2단계 택지에 체육시설인 스포츠컴플렉스 6만9천 3백평의 부지를 도시계획 해 놓았다가 2017년 1월에 취소해 버리고 그 대신 오룡체육공원 부지로 1만 1천 2백평을 계획해 놓은 상태로 전남도가 택지만 늘려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사고 있다. 오룡체육공원 부지도 무안군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체육공원으로 쓸 수 없게 된다. 4년 전 김철주 무안군수 재임 시 남악개발 이익금을 우선 30억이라도 환원해 달라고 전남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비록 패소했다 해도 개발이익금 대신 체육시설이나 문화복지 생활편의시설만이라도 전남도에서 건설해줌으로서 전남도청 소재지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광주에서 전남도청 이전 장소가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로 확정되자 무안군에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을 때 목포시는 도청이전과 연계한 인구 6만명을 수용하는 최첨단 도시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옥암지구 택지개발사업을 발 빠르게 착수하였다. (총사업비 3천 9백 47억원) 그러나 전남도는 남악신도시 개발을 원활하게 추진하고 무안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옥암지구 개발을 전남도가 일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옥암개발 이익금이 180억정도 나오면 이익금의 40%를 목포시에 배분해 준다고 주장했지만, 고인이 되신 권이담 목포시장은 목포 땅은 목포시가 개발하겠다고 고집과 뚝심으로 밀어붙인 결과, 전남도가 계획 및 설계를 하고 목포시가 용지 보상과 시공 분양을 전담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권이담시장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이익금으로 시민문화체육센터 건립, 부주산 공원조성, 신•구도심 연결도로 개설 등 큰 사업을 목포시는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목포시가 전남도와 힘겨루기를 하며 개발이익금을 챙기는 동안 그 당시 무안군은 아무런 대책 없이 방치하다가 무안 땅을 전남도가 독차지하여 개발하고 이익금을 챙겼고 한참 지난 뒤 무안군은 전남도에 이익금을 내 놓으라 소송했지만 사전 약속이 없었고 회의록 등도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던 것이다. 비록 패소하였으니 개발이익금은 못주더라도 전남도청 소재지 도시를 찾는 도민들의 교통편의 운수시설인 시내•시외 여객자동차터미널 등 지원 시설부지들을 무상으로 무안군에 양도해 주어야 전남도청 소재지 도시형태를 갖출 것이다. 기획연재-이야기문학 시(2) 조수웅 시의 재료는 언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물론 미술의 재료는 선과 색채고, 음악의 재료는 리듬과 가락이며 무용의 재료는 몸짓이다. 이들은 각각의 재료를 사용해서 미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예술이지만, 감상법은 많이 다르다. 예컨대 그림이나 노래, 무용 등은 보는 순간에 또는 듣는 순간에 ‘아! 아름답다.’라고 감탄하거나 아니면 ‘에이! 시시해.’라고 무시하는 반응이 나오지만, 시는 한참을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고 때로는 외워 봐야 비로소 감동을 받든지 말든지 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선, 색채, 리듬, 가락, 몸짓 따위는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를 때, 또는 무용할 때만 사용하지, 아무데나 그림을 그리고 다닌다든지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다닌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시의 재료인 언어는 시를 쓸 때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 더 많이 쓰인다. 따라서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시를 쉽게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시를 평하려든다. 말하자면 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시어와 일상어는 똑같은 언어이지만 전혀 다름을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예컨대 자동차 부품 상회에 있는 엔진은 여러 쇳덩어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게 자동차 속에 들어가 다른 부품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면 자동차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변한다. 예를 하나 더 들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늘씬한 아가씨가 요정이나 나이트클럽에 있으면 매우 선정적으로 보이지만, 수영장에 있으면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이렇듯 일상어가 한 편의 시 안에 들어가면 시가 갖고 있는 요소, 일테면 리듬이나 이미지, 어조 등과 유기적으로 얽어져 시어로 형상화됨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소를 웃긴 꽃 윤희상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그래도 소는 마냥 웃더라니까) 그렇다면 시를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시는 일상생활에서 보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그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쓰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돈도 안 되는 것이 만들기만 힘 든다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 이렇듯 시를 일상적 개념으로 대하면 아무런 가치도 느낌도 재미도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일상적 사고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 사람이 어디 밥만 먹고 살 수 있는가. 제 아무리 벼슬이 높고 재물이 많으며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그 권력 그 재물 그 유명세로는 어쩌지 못하는 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무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들뜨고 왠지 애달프며 뭔가를 채워야 할 것만 같은 가슴 한켠, 그것은 계산도 안 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 때 우리는 시를 쓰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거나 동적 구조이므로 그 자체에서 풍기는 리듬이나 의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눈앞에 그려보고 자신의 감정이나 체험을 그것과 결합시켜서 느껴야지 시의 의미를 자꾸 머리 속으로 분석해내려고 하면 안 된다. 마치 친구를 사귀거나, 넥타이 고르듯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한 편의 시를 시어, 리듬, 이미지, 어조, 주제, 연 등으로 분해해서 암기하려고만 든다. 이는 분명한 답을 요구하는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한 시 공부 방법이기는 하지만, 사랑을 공부해서 얻을 수 없듯이, 시는 배우고 가르치며 공부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냥 이해하고 감상하는 일이다. 물론 시는 고도로 조직화된 상징어 따위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 복합적 의미망을 뚫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자전거를 잘 타려면,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도 연습을 거듭해야 하듯,(술꾼이 술맛을 알기까지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감각과 정서를 투여하여, 시와의 몸부림을 계속한다면 시적 감각은 이내 익혀지고야 말 것이다. 한편의 시를 읽고도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대체로 시의 의미를 산문으로 풀어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는 완전한 일상어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는 특수하고도 높은 언어 전달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시적 조직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의 복잡 미묘한 느낌과 태도와 생각을 사실에 보다 가깝게 전달할 수 없으며, 인생과 우주의 은밀한 진실을 그대로 파악하고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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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신문이여, 남악발전을 견인하라(유재길 목포시의정회장)2005년 전남도청이 남악으로 이전한지도 벌써 성년을 맞이하였으나, 도청 소재지다운 도시가 되지 못하고 3만 3천명이 입주하였지만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에 소속된 남악리 시골마을 행정구역인 셈이다. 남악리를 읍으로 승격해 달라고 행자부에 건의하였지만 리에서 읍으로 승격된 예가 없다고 거절당하였다. 또 무안군은 도청소재지이기 때문에 군을 시로 특별히 전환해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현행법상 시 설치 기준법적 요건을 군 단위에 인구 2만5천명 이상의 도시형태를 갖춘 2개 읍이 있어야 하고, 군 전체인구가 15만 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정이라서 시 승격도 어려운 실정이다. 무안군에 속해있는 도청 소재지 남악은 군 단위 예산으로는 야구, 축구, 육상경기를 할 수 있는 공설운동장, 청소년 및 노인복지회관 등 도시 기반생활 편의시설을 당장 만들 수 없으며, 현재 남악에는 초등학교를 신설할 용지가 없기 때문에 과밀 학급에서 초등학생들이 시달리고 있다. 무안군이 모처럼 남악 신도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남악복합 체육시설 건립 (총 450억 / 국비 30%, 군비 70%) 이 기획재정부의 투융자심사에서 보류되어 축소지시대로 설계 변경하였다. 이러한 총체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데 목포구도심에 본사를 두고 남악에 취재본부를 설치하고 서남권에 지국을 설치하여 창간호를 발행하게 된 남악신문의 탄생이야말로 남악의 발전 촛불이 될 뿐 아니라 언론 창달에도 기여할 것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은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언론이 자유롭고 국민 모두가 글을 읽을 줄 아는 나라에서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다. 정직한 사람은 국민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면서 쾌락을 느끼지 않는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제 남악신문은 남악 발전부터 챙겨나가야 한다. 남악 옆 오룡지구 택지개발 1단계 사업이 준공되어 곧 입주하게 된다. 무안군이 전남도로부터 남악신도시 인수 후 각종 공공시설 하자가 발생해 보수하는데 매년 많은 예산이 들어갔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인수인계를 잘 받아야 한다. 도청 소재지 남악다운 위상을 높이려면 앞으로 개발할 오룡지구 2단계 택지에 광주에 있는 김대중 컨벤션센터를 능가하는 제2의 컨벤션센터가 들어와야 한다. (임흥빈 전 도의원이 건의) 또한, 종합체육시설인 스포츠 컴플렉스를 건설해야 한다. 애당초 전남도에서 오룡 2단계 택지에 6만 9천 3백 평을 도시계획 했다가 2017년에 취소하고 택지로 변경했다. 부동산 투기를 한 셈이다. 그리고 서남권을 오가는 시외버스 터미널과 시내버스 종합주차장을 건설해야 한다. 남악과 오룡지구에서 나온 개발 이익금을 체육시설, 문화복지, 생활편의 시설을 건설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