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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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표준어의 규정과 그 기능한 나라에서 공용어(公用語)로 쓰이는 규범적인 언어를 표준어라 한다. 한 나라의 국어에는 대개 많은 방언이 있으므로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대표적인 국어로 인정하고 그 언어 체계를 모든 국민이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표준어는 대개 그 나라의 수도나 문화 중심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표준어의 기반이 되는 일이 많다. 영국의 런던어, 프랑스의 파리어, 일본의 도쿄어, 한국의 서울말 등은 모두 이런 예에 속한다. 우리나라 표준어는 1936년 조선어 학회에서 사정하고 공표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크게 보완하고 합리화하여 1988년 1월에 문교부가 고시하고,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시대적으로 현대, 계급적으로 교양 있는 사람, 지방적으로는 서울 방언을 표준어로 삼는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방언이 고향 색을 느끼게도 해 주고 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미 전달에도 별 지장을 주지 않는데, 꼭 표준어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같은 지방 사람들끼리는 별 지장을 주지 않지만 타 지방 사람과 대화를 하는 데는 불편하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표준어를 정해 쓰는 것이다. 언어가 통일되면 어느 곳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원활해진다. 표준어의 의미는 한글 맞춤법과의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 모든 글은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된 <한글 맞춤법> 규정에 맞도록 우리말을 적게 되어 있다. <한글 맞춤법>의 가장 기준이 되는 조항인 제1항을 보면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말은 ‘한글 맞춤법에 맞도록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표준어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아울러 표준어의 사정 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준어 사정 원칙의 세 부분은 ①총칙 ②발음 변화에 따른 표준어 규정 ③어휘 선택의 변화에 따른 표준어 규정이 그것이다. 종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①총칙에서 ‘중류 사회’가 ‘교양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②③에서 그 전에 없던 복수 표준어에 대한 규정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제26항 한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 몇 가지가 널리 쓰이며 표준어 규정에 맞으면, 그 모두를 표준어로 삼는다.”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옥수수/강냉이, -(으)세요/-(으)셔요, 우레/천둥, 나귀/당-나귀 등등 이다. 이를 복수 표준어라 한다. 다음은 국민들에게 표준어를 보급하고 발전시키려면 그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표준어의 기능을 통일의 기능, 우월의 기능, 준거의 기능으로 나눈다. 첫째는 통일의 기능이다. “표준어는 모든 국민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국민들로 하여금 일체감을 가지게 해준다.” 한 마디로 국민 전체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 시합을 중개할 때에, 뉴스를 알리면서, 어느 기관의 대변인의 성명을 내면서 자기 출신지의 방언을 사용한다면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국민 모두가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을 표준어의 통일의 기능이라고 한다. 둘째는 우월의 기능이다. 표준어는 교육에 의해서 습득되기 때문에 표준어를 잘 사용하는 것은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표준어를 씀으로써 많이 배웠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딱지구실을 하는 것을 표준어의 우월의 기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사투리가 심하면, 듣는 이가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표준어를 표준발음으로 말하면 듣는 이가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셋째는 준거의 기능이다. 표준어는 언어의 규범이므로 일종의 법규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한 번 정한 표준어는 국민 모두가 법규처럼 지키고 바르게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준어는 국어의 통일이며 국어의 통일은 국민의 통일이다. 국민의 통일은 남북통일의 지름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을 소홀히 하자는 것도 아니다. 서울 이외 방언도 각 해당 지역 주민들의 역사적·문화적·정서적인 창조물일 뿐만 아니라 누대에 걸쳐 전승된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속담이 있다. 하물며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나 자기들끼리 사용했던 말로 정담을 나눈다는데 더 사족을 붙여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표준어와 방언은 둘 다 버리기가 아까운 존재이다. 그렇지만 방언이란 지역에 따라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한 사회 안에서도 사회계층이나 직업, 성별 등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므로, 표준어를 기준으로 삼아 모든 국민들이 언어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표준어를 앞세워 지킬 것은 지키는 사회, 질서와 품위를 소중히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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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전남 출신 젊은 경제인들2월에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회장과 김봉진 ‘우아한 형제들’ 의장이 거액을 기부하겠다고 잇달아 선언했다. 국민은 그들의 기부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놀라운 건 두 사람 모두 전남 출신의 젊은 기업가들이라는 점이다. 호남에서 장한 경제인이 나왔음에 큰 감명을 받았다. 먼저,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이 금액은 개인 재산을 기부한 금액 중 역대 최대 수준이다. 현재 김 의장이 보유 중인 카카오의 지분은 13.74%로서 주식 가치는 약 10조 원이다. 그러니 기부금은 5조 원 이상이 된다. 한국 최고 재벌인 삼성 이건희 회장 가족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가족도 기부금이 각기 1조 원이 안 된다. 그러니 김범수 의장의 기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놀랍다. 김범수 의장은 국내 IT 창업가 1세대로 꼽힌다. '흙수저 신화'로 불린다. 김 의장은 담양에서 농사하는 부모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살아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부모가 먹고살기 바빠서 돌봐주지 않았기에 그의 초등학교 첫 성적표는 형편없었다 한다. 그러나 독학하여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을 다녔다.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후, 삼성SDS에 입사해서 다녔지만 창업을 위해 퇴사했다. 1998년에 한게임을 창업해서, 2000년에 이해진이 창업한 네이버와 합병시켰다. 그 NHN의 대표를 7년간 맡았다. 이후 독립해 2010년 카카오톡을 개발했고, 카카오톡이 국민 메신저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현재 카카오는 국내 23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카카오(45조 원)의 주가 총액은 포항제철을 능가한다. 연매출은 연 4조원에 이른다. 김범수 의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에 이은 국내 주식 부자 3위이다. 김 의장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다. 그는 “좋은 기업”이 아니라 “위대한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김봉진 ‘우아한 형제들’ 의장도 재산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배달의 민족을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에 매각하면서 받은 주식 가치 등을 포함해 재산이 1조 원대에 이른다. 기부금은 5000억 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봉진 의장은 완도군 소안면에 딸린 작은 섬 구도에서 태어났다. 이 섬은 인구 100여 명의 작은 섬이다. 김 의장은 “고등학교(수도전기공고) 때는 손님들이 쓰던 식당 방에서 잠을 잘 정도로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어렵게 예술대학을 나온 제가 이만큼 이룬 것은 신의 축복과 운이 좋았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며 자신의 성공을 사회의 도움으로 돌린다. 김봉진 의장은 서울예대 실내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디자인그룹 이모션, 네오위즈, 네이버에 다니다가 2010년에 자본금 3000만 원으로 ‘우아한 형제들’을 창업했다. 그리고 국내 1위 배달앱 '배달의 민족'으로 키워냈다. 완도 출신의 한 지역민은 “소안면 희생자 단체 회장을 맡았던 김봉진 의장의 아버지가 광주로 이사 가서 살다가 5·18도 겪고 큰 고생을 하다가, 서울로 이사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항일의 섬 소안도 출신으로 이런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 고향 출신이라고 하니 가슴이 뿌듯하다.”고 기뻐했다. 김봉진 의장은 세계적 기부클럽인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에 한국인 최초 회원으로 가입했다. '기부(giving)'를 '약속(pledge)'한다는 이 단체는 2010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부부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함께 설립했다. 김 의장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세계에서 219번째 회원이 됐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에서 25번째, 아시아에서는 7번째 서약자가 나온 국가가 됐다. 김봉진 의장은 “제가 꾸었던 꿈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도전하는 수많은 창업자들의 꿈이 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과 김봉진 ‘우아한 형제들’ 의장의 기부 선언은 신선하다. 기존의 재벌들은 ‘부의 대물림’을 당연시해왔다. 또 비리가 터졌을 때 모면하기 위해 기부해왔다. 또 회사의 돈을 내놨다. 반면에 이번에 두 의장은 스스로 기부를 약속했다. 또 회사의 돈이 아닌 私財사재로 기부했다. 전남 출신 두 젊은 기업가가 한국 경제계에서 놀라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흙수저에서 자수성가하여 누구나 알아주는 대기업가가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재벌들도 하지 못한 거액의 기부를 하였다. 전남에서 이런 훌륭한 인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긍지가 샘솟는다. 두 사람을 본받아, 지역 출신 인물들이 더욱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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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궁극적 역할과 의미유년시절 시골의 오일장터에는 서커스판이 곧잘 펼쳐지곤 했다. 서커스 장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언뜻 허름해보였으나 첫 출입구를 지나서 무대 앞으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구간마다 여러 개의 문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 꽤 충격을 주었다. 물론 커다란 통나무 기둥에 두꺼운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진 대여섯 군데의 문들은 불법 입장객을 막을 요량이었을 터이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법 앞에서>라는 단편에서 문의 상징성과 본질에 대한 강렬한 암시를 하고 있다. 주인공인 시골남자는 법문(法門) 앞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에게 문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다. 하지만 시골남자는 끝내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임박해서야 문지기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소. 이제 문을 닫아야 겠소.” 매우 난해해 보이는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각종 이념이나 규율 혹은 허위의 문 안에 스스로 유폐되어 자신을 옥죄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고언으로 들린다. 작품세계가 아니더라도 인간 세상에는 문하나 때문에 목적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영어로 ‘입장료’를 뜻하는 ‘admission fee’와 ‘입장무료’에 해당되는 ‘admission free’ 사이에는 자음(r) 하나 때문에 정반대가 되는 미묘함이 있다. 이는 언어미학적으로 무엇을 함의하는가? 입장시키는 문과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문이 본래 하나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아가서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카프카의 <성>(城)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인은 인간적 실존을 상실한 채 저마다 자본과 탐욕이라는 거대한 성문에 갇혀 허둥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 작가 존 파울즈의 <콜렉터>는 나비 수집을 하는 남자주인공이 대낮에 여대생을 납치하여 자기만의 골방에 가두어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남자는 결코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 그녀의 모든 모습을 기록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여기서 유명한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특이한 심리적 메커니즘의 단초가 형성된다. 갇힌 여성이 나중에는 남자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문의 궁극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은 닫혀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열려 있다는 혹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당연히 문은 열리고 닫히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지만 문의 궁극적인 역할은 열리는 데 있는 게 아닐까. 만약 문의 최종적 기능이 닫히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문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독일어 ‘Tor’는 ‘대문’과 ‘바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는 입을 항상 벌리고 다닌다는 바보를 큰 대문에 비유하여 언어적으로 비하하고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역설적이긴 하지만, 흔히 바보로 칭해지는 이들의 얼굴 표정에 그다지 큰 고통은 서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른바 열림과 수용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들이 있다. 감옥의 문, 군대 위병소의 문, 업무가 끝나고 잠긴 사무실 문, 공동경비구역의 남북을 가로 막는 판문점의 문 등등, 어찌되었건 닫혀있는 문은 일시적일 뿐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영원히 닫힌 문이 세상에 있을까? 혹 연옥문이나 지옥문 정도면 모를까, 닫혀 있어도 언젠가 열려야 할 문들은 많다. 자본주의의 문과 사회주의의 문은 어떻게 다를까?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수많은 장벽과 문들, 이념과 이권으로 단단히 뭉쳐진 굳건한 문들, 사실 한 끗 차이로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장난 같은 세상의 문들을 어찌해야 할까? 사실 사회의 규범이나 국가 및 공공기관이 제정한 각종 규칙과 명령 혹은 법령 등은 단순히 규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사회구성원들을 선도하기 위한 도구나 목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규제나 차단만을 위해 법의 문턱을 만든다면 진정한 법의 취지를 몰각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제는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손으로 숫자를 누르고 카드키를 갖다 대는 것도 귀찮아서 지문 인식으로 들어가고 싶은 문을 따고 유유히 통과하기도 한다. 손가락 지문이 문고리 권력을 행사하는 꼴이다. 지문은 원천적으로 위조가 불가능하므로 몽둥이를 들고 서서 문을 지킬 필요가 없기에 디지털 방식은 간단히 불법 입장객을 막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효율과 편리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사람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정(情)의 문까지 닫혀버릴까 적잖이 우려되기도 한다. 60여 년 전 유년시절에 보았던 서커스 곡마단패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여전히 잘 열리지 않는 인생의 숱한 문들을 곡예처럼 넘나들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도 열려라 참깨(!) 식으로 편리한 숫자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세상이 참되게 깨어나서 좀 더 평화스러워 지려면 모두들 문을 너무 굳게 닫지는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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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 궁금증일 년 가까이 하루도 빼지 않고 코로나19 소식이 전해진다. 코로나 하루 확진자수가 천명대에서 오백명 대로 떨어졌지만 무증상 감염, 재감염, 등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의학 전문가들에 의하면 인류를 구원할 한 줄기 희망은 백신 개발에 의한 예방이라고 한다. 백신개발과 치료제 소식이 들려오지만 변이에 능한 코로나19의 변종 바이러스 소식은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지구촌 사람들을 여전히 불안하게 한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는 백신 접종이 시작 되었다. 원래 백신개발에는 10년 정도가 소요 되어야 하지만 백신의 안정성이나 효과성의 문제점을 감수하고 다수를 위한 이익이 된다면 백신개발의 짧은기간을 넘어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적 결정으로 백신 투여를 하게 된 것이란다.(다큐 인사이트, 기습 KBS). 하지만 노르웨이에서는 화이자에서 개발한 백신 투여 후 80대의 기저 질환자의 사망을 보도 하고 있어 백신접종에 대한 불안감이 든다. 이러한 인류의 전염병은 언제 어떻게 시작 되었고 극복되었을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중 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저서에서 병원균의 시작과 진화가 인류 문명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인류 문명발달의 근간을 이룬 것은 농업혁명에 의한 식량증대이며 이는 야생 동물의 가축화와 야생식물의 작물화를 통해 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길러 활용하고 식용으로도 잡아먹었는데 인류가 소를 가축화 한 이후로 9000년 가까이 함께 살아 왔다고 한다. 그렇게 가축들과 밀접하게 공존하는 마을에 소에게만 있던 질병인 천연두가 인간에게로 전염, 진화될 기회가 되었고 천연두는 수많은 유럽인들과 남미 원주민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제너는 소젖을 짜는 아가씨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음을 알고 우두(소의 급성전염병)에 걸린 여성의 손에서 채취한 고름을 어린소년의 상처에 바른것을 계기로 천연두 백신을 개발, 천연두를 인류로부터 종식 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다이아몬드는 균의 입장에서 전염병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있다. 균이 인간에게 기생하며 사는 동안 기침 등의 증상을 유도하는 것은 바이러스가 종족을 퍼트리기 위함으로 기침이나 설사 안에서 구름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다른 숙주를 찾으려는 생존전략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단과 도시를 선호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더 잘 살고저 손오공처럼 변신, 변종하여 면역 시스템을 교란시키고 진화하며 생존을 이어 간다는 것이다. 메르스나 사스가 같은 코로나 였고 2019년도 다시 변종으로 나타났기에 신종 코로나라 했다가 2019년의 19로 명명한 것은 바이러스의 변종년도를 쉽게 기억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영국에는 이미 변종 코로나의 몸체가 나타났다. 독감은 해마다 변종을 일으킴으로서 그에 맞는 새 백신을 만들어 매년 다시 접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에이즈 또한 면역체계를 교란시키는 끈질긴 생존경쟁을 벌이기 위해 변이와 이동을 멈추지 않는데 바이러스가 골치 아픈 이유의 하나이다. 요즘처럼 지구촌 시대에 빈번한 왕래는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널리 생명을 퍼트릴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는 것이다. 중세 유럽시대 페스트가 들어오는 것을 알아 챈 이탈리아에서 동양 상인들을 대상으로 검역을 위해 40일간 입국 금지를 시킨 후 한곳에 격리시켰다가 증세가 없는 사람들만 통과 시켰다고 한다. 결국 속수무책으로 전염되었지만 과학적 장비가 미비했으나 현대의 자가격리 처럼 나름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진다. 코로나19 여파로 세계 각국은 봉쇄니 폐쇄니 하며 왕래를 금하고 있다. 중세시대나 첨단의 4차산업시대나 인간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위력을 지닌 바이러스! 천연두 페스트와 함께 인류가 앓았던 인플루엔자, 장티푸스, 홍역, 에이즈 등은 동물의 질병이었던 것이 지금은 인간들의 전염병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런 홍역을 치르고서도 근절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화중농업대 천환춘교수는 작년 2월 9일 기자회견에서 "신종 전염병 중 78%는 야생동물에서 유래됐거나 야생동물과 연관된다" 면서 "우리는 야생동물을 애완용으로 적게 사육하고 절대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해 예방이 근본적이고 장기적 대책이 될 것이므로 인간들의 야생 동물 접촉과 식용 금지를 시사했다. 중국우환 발 코로나니 신빙성있는 속내인지도 모른다. 코로나 19 백신개발도 예방을 위한 전략의 하나지만 그 보다 앞서야할 예방은 야생동물접촉 금지여야 한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한다는 한국 사람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야생동물을 놀잇감 삼는 사람들이 맞물려 야생동물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자양강장을 위하여 뱀, 마멋, 천산갑 등을 먹는 원시적 식습관을 고수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후진국에 갈 때는 야생동물 경계와 주지의 교육을 해야 한다. 매스컴의 적극적인 홍보와 각급학교에서 이번 코로나 교훈을 각인 시킬 필요도 있다. 야생동물과의 관계, 적당한 거리로 공존 할 때 아름답다. 코로나 종식까지는 당분간 마스크와 집이라는 생활 백신, 야생동물 금식은 또 다른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예방 백신이 될 것이다. 안전하고 효과있는 의학백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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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핵무기의 제조과정과 그 위력2017년 9월 6일 오전 6시 57분경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발사된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770km 고도까지 치솟은 뒤 3700km를 날아가 북태평양 해상에 낙하했다. 이런 미사일에 소위 세계 3대 핵무기인 원자폭탄, 수소폭탄, 중성자탄을 실어 상대방의 나라에 쏘아댄다면 그 피해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면 세계 3대 핵무기의 중 최초 핵무기인 원자폭탄의 제조 과정과 이를 응용한 수소폭탄, 중성자탄의 위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933년 항가리 태생인 미국의 물리학자 래오 실라르드(1898~1964)는 핵연쇄반응을 발견하여 핵에너지를 이용 수 있는 길을 열었고, 1938년 말 독일에서는 오토 한과 프리즈 슈트라스만이 우라늄 235을 이용하여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하였다. 이런 실험들은 핵폭탄 제조의 기초이다. 그런데 1939년 나치 독일은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발 빠르게 우라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실라르드와 아인슈타인은 1939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를 받아들인 미국 정부는 즉시 맨해튼 계획에 착수했다. 이때 실라르드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1942년에는 페르미와 함께 우라늄과 흑연을 이용하는 시카고파일이라는 최초의 원자로를 건설해 중성자를 이용한 핵분열반응을 실험하는 데 기여했다. 1945년 여름에 이르러 핸퍼드 연구소는 핵폭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 239를 만들어 냈으며, 핵폭발의 실제 실험일정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무기개발과 설계도 충분히 진행되었다. 맨해튼 계획에는 당시 20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배정되었고, 모두 13만 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되었다. 다음백과에 의하면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남쪽으로 193km 떨어진 앨러머고도 공군 기지에서 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이 폭탄은 과학 장비로 둘러싸인 강철탑 위에서 폭발했고, 여기서 9km 떨어진 벙커에서는 과학자들과 몇몇 고위인사가 원격 감시장치로 폭발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 “폭탄이 터지자 강렬한 섬광과 급격한 열파(熱波)가 일어나고, 이어 충격파가 일어나 골짜기에 메아리치자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당장 불기둥이 치솟았고, 버섯구름이 1만 2,200m 상공까지 퍼져 올라갔다. 원자폭탄은 1만 5,000t~2만t의 TNT에 해당하는 폭발력을 냈다. 강철탑은 완전히 증발해버렸고, 반지름 730m 안에 있는 주변 사막의 모래는 완전히 녹아버렸다.”고 한다. 그해 8월에는 맨해튼 계획에 의해 생산된 다른 2개의 원자폭탄이 각각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되었다. 하나는 우라늄 235를 사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루토늄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핵의 본질은 결국 에너지라 하는 열운동이며, 우주에서 가장 큰 에너지는 원자(原子)가 보유하고 있다. 원자 중 우라늄 U-235을 고성능 화약과 함께 밀폐하여 폭파시켜 원자를 분열시키면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됐는데 이것이 핵폭탄이다. 이 때의 온도는 1만도가 넘는다. 핵폭탄에 우라늄 U-235 또는 플루토늄을 밀폐시켜 폭발시키면 원자가 분열하면서 100만 도 이상의 열이 방출되는 데 이를 원자폭탄이라 한다. 이에 비해 수소폭탄은 핵융합(Fusion)이라 하여 수소원자를 합치는 이론이다. 즉 수소원자가 합하면 1천만도 이상의 에너지가 나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많은 에너지가 나오게 하려면 원자탄을 수소와 함께 밀폐시켜 핵을 폭파시키면 핵융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수소폭탄이다. 이 폭탄의 성능은 무시무시한 살상력에 있다. 중성자탄은 수소폭탄의 변종이다. 수소폭탄의 기폭제인 플루토늄탄을 기폭제로 대치하여 투과성이 좋은 중성자만을 방출하도록 만들어진 폭탄이다. 900m 상공에서 폭발 시 폭풍이나 열복사가 없어 자연피해는 적으나 반경 1.5km 내의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중성자탄은 핵무기 기술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자폭탄의 제조 과정과 수소폭탄, 중성자탄의 위력에 대해 일반 상식선에서 살펴보았다.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들이 지구를 여러 번 초토화시킬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공할 무기로 동맹국을 보호하고 있으며, 한국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다. 그런데도 최근 전술핵 재배치나 핵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금해야 하지만 우리 자체의 핵무기 개발도 해서는 안 된다. 모두 다 우리에겐 두려운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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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핵무기의 제조과정과 그 위력세계 3대 핵무기의 제조과정과 그 위력 2017년9월 6일 오전 6시 57분경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발사된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770km 고도까지 치솟은 뒤 3700km를 날아가 북태평양 해상에 낙하했다. 이런 미사일에 소위 세계 3대 핵무기인 원자폭탄, 수소폭탄, 중성자탄을 실어 상대방의 나라에 쏘아댄다면 그 피해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면 세계 3대 핵무기의 중 최초 핵무기인 원자폭탄의 제조 과정과 이를 응용한 수소폭탄, 중성자탄의 위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933년 항가리 태생인 미국의 물리학자 래오 실라르드(1898~1964)는 핵연쇄반응을 발견하여 핵에너지를 이용 수 있는 길을 열었고, 1938년 말 독일에서는 오토 한과 프리즈 슈트라스만이 우라늄 235을 이용하여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하였다. 이런 실험들은 핵폭탄 제조의 기초이다. 그런데 1939년 나치 독일은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발 빠르게 우라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실라르드와 아인슈타인은 1939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를 받아들인 미국 정부는 즉시 맨해튼 계획에 착수했다. 이때 실라르드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1942년에는 페르미와 함께 우라늄과 흑연을 이용하는 시카고파일이라는 최초의 원자로를 건설해 중성자를 이용한 핵분열반응을 실험하는 데 기여했다. 1945년 여름에 이르러 핸퍼드 연구소는 핵폭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 239를 만들어 냈으며, 핵폭발의 실제 실험일정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무기개발과 설계도 충분히 진행되었다. 맨해튼 계획에는 당시 20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배정되었고, 모두 13만 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되었다. 다음백과에 의하면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남쪽으로 193km 떨어진 앨러머고도 공군 기지에서 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이 폭탄은 과학 장비로 둘러싸인 강철탑 위에서 폭발했고, 여기서 9km 떨어진 벙커에서는 과학자들과 몇몇 고위인사가 원격 감시장치로 폭발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 “폭탄이 터지자 강렬한 섬광과 급격한 열파(熱波)가 일어나고, 이어 충격파가 일어나 골짜기에 메아리치자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당장 불기둥이 치솟았고, 버섯구름이 1만 2,200m 상공까지 퍼져 올라갔다. 원자폭탄은 1만 5,000t~2만t의 TNT에 해당하는 폭발력을 냈다. 강철탑은 완전히 증발해버렸고, 반지름 730m 안에 있는 주변 사막의 모래는 완전히 녹아버렸다.”고 한다. 그해 8월에는 맨해튼 계획에 의해 생산된 다른 2개의 원자폭탄이 각각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되었다. 하나는 우라늄 235를 사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루토늄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핵의 본질은 결국 에너지라 하는 열운동이며, 우주에서 가장 큰 에너지는 원자(原子)가 보유하고 있다. 원자 중 우라늄 U-235을 고성능 화약과 함께 밀폐하여 폭파시켜 원자를 분열시키면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됐는데 이것이 핵폭탄이다. 이 때의 온도는 1만도가 넘는다. 핵폭탄에 우라늄 U-235 또는 플루토늄을 밀폐시켜 폭발시키면 원자가 분열하면서 100만 도 이상의 열이 방출되는 데 이를 원자폭탄이라 한다. 이에 비해 수소폭탄은 핵융합(Fusion)이라 하여 수소원자를 합치는 이론이다. 즉 수소원자가 합하면 1천만도 이상의 에너지가 나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많은 에너지가 나오게 하려면 원자탄을 수소와 함께 밀폐시켜 핵을 폭파시키면 핵융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수소폭탄이다. 이 폭탄의 성능은 무시무시한 살상력에 있다. 중성자탄은 수소폭탄의 변종이다. 수소폭탄의 기폭제인 플루토늄탄을 기폭제로 대치하여 투과성이 좋은 중성자만을 방출하도록 만들어진 폭탄이다. 900m 상공에서 폭발 시 폭풍이나 열복사가 없어 자연피해는 적으나 반경 1.5km 내의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중성자탄은 핵무기 기술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자폭탄의 제조 과정과 수소폭탄, 중성자탄의 위력에 대해 일반 상식선에서 살펴보았다.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들이 지구를 여러 번 초토화시킬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공할 무기로 동맹국을 보호하고 있으며, 한국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다. 그런데도 최근 전술핵 재배치나 핵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금해야 하지만 우리 자체의 핵무기 개발도 해서는 안 된다. 모두 다 우리에겐 두려운 존재들이다. 2021. 1. 5. 송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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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 궁금증코로나 백신 궁금증 노 운서 교육학 박사 일 년 가까이 하루도 빼지 않고 코로나19 소식이 전해진다. 코로나 하루 확진자수가 천명대에서 오백명 대로 떨어졌지만 무증상 감염, 재감염, 등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의학 전문가들에 의하면 인류를 구원할 한 줄기 희망은 백신 개발에 의한 예방이라고 한다. 백신개발과 치료제 소식이 들려오지만 변이에 능한 코로나19의 변종 바이러스 소식은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지구촌 사람들을 여전히 불안하게 한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는 백신 접종이 시작 되었다. 원래 백신개발에는 10년 정도가 소요 되어야 하지만 백신의 안정성이나 효과성의 문제점을 감수하고 다수를 위한 이익이 된다면 백신개발의 짧은기간을 넘어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적 결정으로 백신 투여를 하게 된 것이란다.(다큐 인사이트, 기습 KBS). 하지만 노르웨이에서는 화이자에서 개발한 백신 투여 후 80대의 기저 질환자의 사망을 보도 하고 있어 백신접종에 대한 불안감이 든다. 이러한 인류의 전염병은 언제 어떻게 시작 되었고 극복되었을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중 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저서에서 병원균의 시작과 진화가 인류 문명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인류 문명발달의 근간을 이룬 것은 농업혁명에 의한 식량증대이며 이는 야생 동물의 가축화와 야생식물의 작물화를 통해 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길러 활용하고 식용으로도 잡아먹었는데 인류가 소를 가축화 한 이후로 9000년 가까이 함께 살아 왔다고 한다. 그렇게 가축들과 밀접하게 공존하는 마을에 소에게만 있던 질병인 천연두가 인간에게로 전염, 진화될 기회가 되었고 천연두는 수많은 유럽인들과 남미 원주민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제너는 소젖을 짜는 아가씨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음을 알고 우두(소의 급성전염병)에 걸린 여성의 손에서 채취한 고름을 어린소년의 상처에 바른것을 계기로 천연두 백신을 개발, 천연두를 인류로부터 종식 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다이아몬드는 균의 입장에서 전염병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있다. 균이 인간에게 기생하며 사는 동안 기침 등의 증상을 유도하는 것은 바이러스가 종족을 퍼트리기 위함으로 기침이나 설사 안에서 구름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다른 숙주를 찾으려는 생존전략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단과 도시를 선호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더 잘 살고저 손오공처럼 변신, 변종하여 면역 시스템을 교란시키고 진화하며 생존을 이어 간다는 것이다. 메르스나 사스가 같은 코로나 였고 2019년도 다시 변종으로 나타났기에 신종 코로나라 했다가 2019년의 19로 명명한 것은 바이러스의 변종년도를 쉽게 기억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영국에는 이미 변종 코로나의 몸체가 나타났다. 독감은 해마다 변종을 일으킴으로서 그에 맞는 새 백신을 만들어 매년 다시 접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에이즈 또한 면역체계를 교란시키는 끈질긴 생존경쟁을 벌이기 위해 변이와 이동을 멈추지 않는데 바이러스가 골치 아픈 이유의 하나이다. 요즘처럼 지구촌 시대에 빈번한 왕래는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널리 생명을 퍼트릴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는 것이다. 중세 유럽시대 페스트가 들어오는 것을 알아 챈 이탈리아에서 동양 상인들을 대상으로 검역을 위해 40일간 입국 금지를 시킨 후 한곳에 격리시켰다가 증세가 없는 사람들만 통과 시켰다고 한다. 결국 속수무책으로 전염되었지만 과학적 장비가 미비했으나 현대의 자가격리 처럼 나름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진다. 코로나19 여파로 세계 각국은 봉쇄니 폐쇄니 하며 왕래를 금하고 있다. 중세시대나 첨단의 4차산업시대나 인간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위력을 지닌 바이러스! 천연두 페스트와 함께 인류가 앓았던 인플루엔자, 장티푸스, 홍역, 에이즈 등은 동물의 질병이었던 것이 지금은 인간들의 전염병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런 홍역을 치르고서도 근절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화중농업대 천환춘교수는 작년 2월 9일 기자회견에서 "신종 전염병 중 78%는 야생동물에서 유래됐거나 야생동물과 연관된다" 면서 "우리는 야생동물을 애완용으로 적게 사육하고 절대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해 예방이 근본적이고 장기적 대책이 될 것이므로 인간들의 야생 동물 접촉과 식용 금지를 시사했다. 중국우환 발 코로나니 신빙성있는 속내인지도 모른다. 코로나 19 백신개발도 예방을 위한 전략의 하나지만 그 보다 앞서야할 예방은 야생동물접촉 금지여야 한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한다는 한국 사람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야생동물을 놀잇감 삼는 사람들이 맞물려 야생동물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자양강장을 위하여 뱀, 마멋, 천산갑 등을 먹는 원시적 식습관을 고수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후진국에 갈 때는 야생동물 경계와 주지의 교육을 해야 한다. 매스컴의 적극적인 홍보와 각급학교에서 이번 코로나 교훈을 각인 시킬 필요도 있다. 야생동물과의 관계, 적당한 거리로 공존 할 때 아름답다. 코로나 종식까지는 당분간 마스크와 집이라는 생활 백신, 야생동물 금식은 또 다른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예방 백신이 될 것이다. 안전하고 효과있는 의학백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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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문헌 기록(上)마한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문헌 기록(上) 박해현(초당대·마한역사문화연구회 마한연구소장) 한국고대사의 원형인 마한의 역사는 문헌에 거의 없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살펴보면 전혀 없지 않다. 역사는 기록을 토대로 과거의 진실에 접근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문헌을 통해 역사적 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유물, 유적 등 과거의 흔적을 통해 문헌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먼저 마한에 대한 기록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1. 마한에 대한 첫 문헌기록 ①<三國志 위서 동이전>(3세기 말 기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마한은 한(韓)에 속하며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을 구성하였다.) 【해설】 마한이 진한 변한과 삼한을 구성하였는데, 삼한을 ‘韓’이라 하였다. 이를 가지고 일부에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어원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이는 호사가의 추측일 따름이다. ②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중략)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늙은 노인이 세를 전하여 말하길 옛날 '秦'의 사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누어 주었다. (중략)㉡그 열두 나라는 '진왕'에 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이 하여, 대대로 잇는다.) 【해설】 ㉠ 마한이 동쪽 땅을 진한에게 떼어 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상도도 원래는 마한 땅이었음을 말해준다. ㉡ 삼한 이전에 한반도 남쪽에는 진(辰)국이 있었다. 진국의 왕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마한이 삼한을 대표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삼국지』는 290년 경 진수(陳壽))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 있는 ‘동이전’은 이보다 약 150년 늦게 편찬된 『후한서』 동이전과 함께 한국사의 초기 역사를 살피는 데 중요하다.) 2. “삼한의 뿌리는 마한이고, 마한이 가장 강대하였다.”는 내용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중엽 기록)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삼한 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해설】 마한이 삼한 중 가장 강대하므로 마한 왕이 진왕이 되어 목지국에 도읍을 하였다. 그리고 삼한의 왕들은 모두 마한 출신이다. <주서 열전 백제전>(6세기 초 기록) 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백제는 선조들이 마한에 속국으로 있었다. 부여의 별종이다. 【해설】 백제가 마한의 속국이었으며 부여의 별종이라는 주서의 내용이다. 이는 백제가 종족계통으로는 부여계통이며, 백제는 앞서 마한의 속국이었다는 내용 (※『朱書』- 638년 완성된 중국의 正史) 여기까지 살핀 결론은 ① 마한이 삼한 가우데 가장 크고 마한 왕이 삼한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내용이고, ②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 원래는 마한에 속해 있었다는 내용. 곧 한국고대사의 뿌리가 마한임을 입증하고 있음. 특히 백제를 부여의 별종이라 한 것은 마한과 혈통이 다름을 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와 마한은 근본적으로 문화구성이 달랐다. 3. 마한 성립 시기에 대한 문헌기록 <三國志 위서 동이전>(3세기 말 기록) (滿)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고조선 準王이 衛滿에 쫒겨 바다를 통해 韓으로 망명하여 王을 칭했다.) 【해설】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 쫓겨 남쪽 韓으로 피신하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기원전 194년에 당시 (馬)韓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마한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마한의 성립 시기를 ‘기원후’로 보려는 경향이 남아 있다. 4. 마한 사회 구조에 대한 문헌기록 <三國志 위서 동이전>(3세기 말 기록)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토착인이며, 씨를 뿌리고 양잠을 하며 베를 짠다. 각각 장수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는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해설】마한 사람들이 유이민 집단이 아닌 토착세력임을 알려주고 있다. 성곽이 없다는 것은 평야 지역에 있고 서로 세력이 공존하기 때문에 상호간에 전쟁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5. 마한의 풍습 및 마한의 기원을 알려주는 기록<三國志 위서 동이전> ①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②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①그 장례 풍속에 곽(槨)은 있는데 관(棺)이 없고, 소와 말을 탈 줄 몰라서 소와 말은 모두 죽어 없앤다. ②구슬을 보물로 여겨서 옷에 꿰매서 장식하기도 하고, 목걸이, 귀걸이로 삼았다. 금은과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해설】 ①소나 말을 장례에 사용하였다는 것은 마한 사회의 순장 풍습 알려주는 사료로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소뼈’와 ‘광주 연산동 산정 유적 소 모양 토제품’은 이러한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②‘마한인은 구슬(玉)을 금은보다 보물로 여겼다.’ 마한인은 금,은보다 옥을 중시한다는 내용인데, 영산강 유역 고분군에서 엄청난 구슬 출토되지만 금강 이북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어 영산강 유역이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 역사의 시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하겠다. 마한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문헌 기록(下) 그러면 이 가운데 몇 문헌을 심층 분석해보고자 한다. 먼저 “삼한의 뿌리는 마한이고, 마한이 가장 강대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후한서 동이열전>의 다음의 사료를 다시 보도록 하자.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①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②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인데 ① 마한이 가장 강대하였고,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②삼한 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이 사료에서 마한이 한반도 남쪽에 있는 진국의 여러 나라 가운데 ①마한이 가장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②삼한의 여러 왕들을 모두 마한출신이 하였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삼한의 왕을 진한, 변한 출신이 아닌 마한 출신이 하였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삼한은 사실상 마한의 세력권에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한이 토착세력인데 비해 백제는 부여계열의 유이민 세력이 세운 나라임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6세기 초 기록인 <주서 열전 백제전>에 "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백제는 선조들이 마한에 속국으로 있었다. 부여의 별종이다.)" 라는 기록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백제 건국 초기에는 마한의 소국이었다는 사실과 백제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마한과는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마한과 백제가 분명이 종족 계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백제와 마한의 종족 계통이 다르다는 사실은, 예맥족의 신앙에서 '새(鳥,) 사슴 신앙이 분화되어 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는 사슴과 관련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고 한다.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은 백제가 부여계통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다. 반면 마한이나 신라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계있는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 마한이 '새'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삼한의 소도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솟대에 새'가 있는 솟대 신앙은 삼한의 대표적인 신앙이다.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토기 문화를 상징하는 '조족문(鳥足紋)토기'를 보면 새(鳥)발자국이 선명히 토기 몸체 전면에 새겨 있다. 솟대 신앙이나 조족문 토기를 통해 볼 때 '새'가 마한 문화권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마한을 비롯한 진한 곧 신라도 새 계통인 '닭'을 집단의 표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경주를 '계림'이라 한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마한과 진한처럼 한반도 남부에 서 나타난 '새'와 관련된 문화의 표상은 '매'를 상징하는 '응준'으로 나타났다. 원래 응준은 고려 때 문인 이승휴는 백제의 표상으로 이해하였다. 이승휴 훨씬 이전 선덕여왕 때 준공된 황룡대 9층탑의 찰주본기에도 백제를 '응유'라 하여 역시 매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를 '응준'과 연결을 지어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고, 그 사실이 우리 지역 인정도서에 버젓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새', '매'의 총칭으로 쓰는 '응준(鷹準매응, 매준)'을 '사슴'을 상징으로 하는 백제의 상징으로 살피는 이치에 맞지 않다. 위에서 살폈듯이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정치체를 확인하여준 조족문 토기나 삼한 문화의 상징인 소도 등은 모두 새와 관련이 있어 응준은 오히려 마한, 그중에서도 영산강 유역 마한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용맹한 사람'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응준'은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전에 "마한의 사람됨은 몹시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라고 한 기록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 마한인은 '응준'처럼 용맹스러워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역사적 사실로 남아 후세에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진서 사이전에도 "(마한 사람들은) 성질은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고 하여 마한인의 용맹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역시 같은 사이전 기록에 "나라 안에 役事가 있으면, 나이가 젊고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큰 노끈으로 꿰어서 지팡이에 그 노끈을 매어 내두르게 하면서 종일토록 소리를 지르고 일을 하지만 조금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활과 방패와 창을 잘 쓸 줄 안다"고 되어 있다. 이렇듯 마한 사람들의 용맹함을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마한인들이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강건한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하겠다. 진서 사이전 마한 조에 "풍속은 기강이 적고, 꿇어앉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거나,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여 마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 또한 마한이 중화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연맹체를 유지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 기록들은 마한의 강성함을 상징적으로 알려주고, 매의 의미를 지닌 '응준'이라는 명문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 무렵 것으로 여겨지는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녹유탁잔에 '응준'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을 보면, 피장자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시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 '응준'이라 부르는 마한의 주된 거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차령이남 여러 곳에 '매'와 관련된 기록이 집중되고 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고려 충렬왕 원년 설치된 '응방(鷹坊)'의 중심이 나주 장흥부 관할이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전라도 지리산에 '응준'이 서식하여 매년 공물로 진상한다" 라고 하여, '매'의 산지로 전라도 지역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지역과 '매'의 관계가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전북 진안 지역에서 '매'를 이용한 꿩 사냥 전통이 남아 있는 것도, 매와 전라도 지역이 전통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매' 곧 '응준'이 마한과 관련된 상징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마한과 관련된 상징이 선덕여왕 때 백제의 표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백제와 마한의 통합 이후 마한 세력이 백제를 대표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문헌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마한관련 문헌을, 국내외의 사서에 흩어져 있는 관련 흔적과 유기적으로 엮어내고 유적 유물과 연결을 지어 해석하면 영산강 유역 마한사는 새롭게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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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산황금산 오솔길 따라 볼 살짝 물든 단풍잎 사이를 걸어 황금산에 오르면 서산 바다만 눈에 들고 황금은 간 데 없다 스쳐가는 바람이 속삭인다 바다가 황금이요 갯벌이 황금이라 모든 것이 다 마음속에 있소이다 황금산 : 충남 서산시 대산면 독곷리에 있는 나지막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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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문화의 특질과 정체성마한문화의 특질과 정체성 박혜현칼럼 최근 유명한 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광주 모 방송에 출연하여 ‘마한 문명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고, 마한 연구자들과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필자는 도올 선생이 어떠한 관점에서 마한사를 보려는가, 그리고 그의 시각이 철저한 실증 속에서 형성된 것인가를 방청석에서 살폈다. 그의 주장은 한국 고대사를 마한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해상무역이 마한문명의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필자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객관적인 연구에 입각하여 내려진 결론이 아닌 동양철학자의 직관에 입각하여 나온 것이기에 한계는 물론 있다. 필자는 늘 마한 문화의 특질이 곧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임을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다. 하지만 백제 중심의 마한의 관점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필자의 주장이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걸리리라 믿는다. 그동안 필자가 주장한 내용의 일단을 정리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다시들 지역의 연맹 세력은 영산강 건너의 시종·반남 지역에 있었던 내비리국 등과 함께 마한 남부 연맹의 핵심 정치체로서 상호 경쟁과 협조를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갔다. 진서 사이전 마한조의 "(마한인들은) 비록 싸우고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서로 먼저 굴복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마한 남부 연맹의 실상을 보여준다. 영산강식 토기나 옹관묘, 영산강식 석실을 공유하며 문화적 동질감을 확립하였다. 복암리 3호분의 96호 석실이 최대 9구, 5호 석실은 4구, 6호 석실은 2구 이상, 7호 석실은 2구의 시신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처럼 한 석실 안에 2인 이상이 안치된 것은 영산강 유역의 다장 풍속과 관련이 있다. 7호 석실 경우도 착용품인 환두대도 등을 볼 때, 피장자 모두 남성이라 생각되어 같은 시기 부부 합장묘의 전통이 나타나는 백제 고분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6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백제의 전통과 무관함을 알려준다. 복암리 고분군에서 비교적 늦게 조영된 1호분의 조영 시기나 형식, 부장품 등에서 백제적 요소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백제의 지배를 받은 구체적 사례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복암리 1호분 석실의 구조 중에서 문틀식 현실문, 장방형에 가까운 현실 평면, 양벽의 조임 흔적, 긴 연도부 등과 같은 특징들은 대표적인 영산강식 고분 형태이다.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신분은 복암리 3호분 5호, 16호 피장자들보다 위계가 높으나 7호 석실의 피장자와는 비슷한 위계로 여겨진다. 5호 석실에는 4명이 합장되었고, 16호 석실에는 소형화된 석실에도 불구하고 3명이 합장되었으나 7호 석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만 2명만이 석제두침을 하고 직장되어 있다. 단독장을 하고 있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신분이 다른 복암리 고분 피장자들보다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다. 복암리 1호분은 한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실 앞에서 장례 의식이 행해진 제사 공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백제의 다른 고분들에서 전혀 발굴되지 않은 녹유탁잔(綠釉托盞)이 출토되었는데, 이 탁잔이 일부러 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분구 조영을 마무리하면서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지위가 인근 마한 남부 연맹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권력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복암리 1호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탁잔의 바닥에 묵서로 '鷹○'라는 글자가 적혀 있기 녹유탁잔이 있다.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 탁잔은 백제 영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아홉에 불과할 정도로 희소한 토기이다. 녹유는 당시 아직 중국의 청자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것으로, 현재 녹유 제작과 관련된 단서가 발견된 곳은 부여 쌍북리 요지와 동남리 요지뿐이다. 녹유 그릇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최상위층 등의 제한적 수요를 위하여 소량으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중한 녹유제품을 傳世하지 않고 부장품으로 사용한 사례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경우가 유일하다. 전실 앞의 제사 행위에 직접 사용된 토기를 깨뜨려 함께 부장해버리는 행위 또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死者의 배타적 소유를 염원하는 행위이다. 1호분의 피장자 지위가 절대적인 존재였음을 짐작한다.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탁잔의 바닥 외면에 2자(字)의 묵서 명문이 있다. 녹유의 박리가 심하여 분명하지는 않지만 위 글자는 '鷹'으로 추정되고, 아래 글자는 '人'변이 확인되고 있다. '鷹'자를 기준으로 살필 때, 기왕에 백제의 별칭이라고 이해된 '응준'의 '鷹'자일 가능성이 높다. 응준(鷹準)은 '매'와 '새매' 즉, 매의 총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용맹한 사람'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한전에 "마한의 사람됨은 몹시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라는 기록이 있다. 『진서』 사이전에도 "(마한 사람들은) 성질은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고 하여 마한인의 용맹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역시 같은 사이전 기록에 "나라 안에 役事가 있으면, 나이가 젊고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큰 노끈으로 꿰어서 지팡이에 그 노끈을 매어 내두르게 하면서 종일토록 소리를 지르고 일을 하지만 조금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활과 방패와 창을 잘 쓸 줄 안다"고 되어 있다. 이는 마한 사람들의 용맹함을 중국인들이 인식하였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용맹스럽고 사납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에서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마한인이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진서』 사이전 마한 조에 "풍속은 기강이 적고, 꿇어앉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거나,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여 마한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 또한 마한이 중화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연맹체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마한 남부 연맹과 대립을 하였던 백제를 통해 마한에 대한 소식을 주로 들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측 기록들은 마한의 강성함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매의 의미를 지닌 '응준'이 명문으로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응준'이라는 칭호가 복암리 1호분 피장자에게 붙여진 것은, 그가 마한 연맹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고려 후기에 서술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후왕(백제 성왕을 지칭함) 혹은 남부여라고 부르거나 혹은 응준으로 부르며 신라와 싸웠다(後王或號南扶餘 或稱鷹準與羅鬪)"라고 한 기록이 있다. 성왕 때 백제를 '남부여', 또는 '응준'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 백제 왕실이 부여족을 계승하였음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475년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부여계 백제 왕실은, 494년 북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그들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