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화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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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추억<마음을 여는 시> 추억 이순자 시인 허공을 열면 만취해 누운 추억의 담을 무시로 흔들어 너, 이름 부르면 미련의 푸른 불빛들 하나씩 안고 사색의 돛단배 띄우고 있다 너, 가고 남은 이름이 내 맘속에서 사철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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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목사의 헬라어 번역성경, 『로마서』 신간 안내박경호목사의 헬라어 번역성경, 『로마서』 신간 안내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은 공인성경본문에 해당하는 스테판(1550) 헬라어 사본을 번역하여 현재까지 4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을 출판했다 이 번역성경은 원어의 어원을 파악하고 일대일 직역 방식으로 번역한 국내 최초의 번역성경이다. 헬라어 번역성경 New Series 4복음서 중 첫 번째인 마태복음의 메인주제는 ‘계명순종’이다. 즉, 마태복음을 숙독하면 계명순종으로 인도하여 거듭나게 한다. 두 번째인 누가복음의 메인주제는 ‘죄사함의 조건 : 온전한 회개’이다. 누가복음은 온전하고 완전한 회개로 구원을 얻게 해준다. 세 번째인 마가복음은 구원을 받았다 해도 귀신으로 인해 타락하여 구원을 잃게 될 수 있기에 그 귀신을 추방하여 구원을 잃지 않게 하는 원리를 보여주는 책이며, 메인주제는 ‘죄의 원인 : 귀신, 귀신추방’이다. 마지막 요한복음은 거듭남부터 영원한 생명까지의 과정이며, 복음을 전파하여 타인을 천국으로 인도하기에 메인주제는 ‘영원한 생명과 그 전파’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천국에 들어갈지 수 있을지를 진단해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2022년 5월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로마서』가 출판되었다. 이미 출판된 NEW 4복음서와 NEW 요한계시록에서 보시다시피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의 모든 번역은 헬라어 한 단어를 오직 한글 한 단어로 선정하여 그 한 단어의 의미를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고정적으로 적용하여 번역할 때 훨씬 더 정확한 성경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로마서는 기존 로마서와 판이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이신칭의’를 이끌어 낸, 정의의 오류를 정정시키는 놀라운 쾌거를 만들어 냈다. 결국, 바른 번역으로, 이신칭의의 오해로 구원을 착각시킨 시대적인 과오가 수정되는 것이다.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은 2,000년 전, 바울 자신이 피력하고 싶은 내용을 자신만의 합성어방식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단어들을 그대로 한글로 직역하여 기존 로마서와는 전혀 새로운 책으로 탄생되었다. 거듭남과 구원과 영생이라는 4복음서의 길고 긴 영적 여정이 한 권으로 요약된 ‘복음의 교리’로 당신을 초대한다. 역자 박경호 목사(예장 합동 사복음교회 목사)는 20년 넘게 원어 번역에 매진한 원어 성경 연구가이다.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 후,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에, 진리를 찾아 오랫동안 방황하고, 기존 성경으로는 이해되지 않아 필사도 해보고, 영어성경을 수차례 정독하여도, 약간의 이해증진만 있을 뿐 의혹이 늘어남을 경험하였고, 2,000년부터 헬라어 성경 4복음서를 번역하면서 처음으로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현재는 전세계 성도들을 위하여 원어에 가장 가까운 성경을 만들고자하는 사명자로서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번역성경 문의처 : 담당 이재갑 010-4338-6985, jaegap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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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갤러리> 화제 : 계곡, 장백산 화백<남악 갤러리> 화제 : 계곡, 장백산 화백 (남악신문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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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코너> 매난국죽의 매력<구독자 코너> 매난국죽의 매력 김봉임 자연이란 만물의 근원은 생각할수록 오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밭에 심어둔 매화나무 두 그루를 작년 가을에 빙 돌라 가지치기를 해주었다. 그 덕에 올해는 매화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서툰 솜씨지만 도화지에 매화꽃 그림을 그려 벽에 붙여 놓았다. 조선 시대 여인들은 치맛자락에 매화꽃을 그리고 수를 놓기도 하였다는데 그 매력이 참 쏠쏠했을 것 같다. 나도 그림 그리기나 수 놓기를 좋아해 난을 치고 그 위에 진한 혹은 연한 회색 실을 섞어가며 수를 놓아 두 폭 병풍을 만들기도 했었다. 아직도 그 병풍을 지니고 있어서 바람막이로 사용하고 있다. 며칠 전에도 도화지에 붓가는 대로 난을 치다가 문득 자세히 들여다보니 선이며 그 자태가 제법 고풍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그리지 못한 묵화이지만 벽에 걸린 매화꽃 그림 옆에 나란히 걸어 놓았다. 엊그제는 조그만한 화단에 물을 주다 보니 국화 싹이 불쑥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반가움에 물을 흠씬 뿌려 주면서 가을 국화 향기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그러고 보면 국화는 참 상서로운 꽃인가 보다. 결혼이나 칠순 잔치 때는 행사장에 울긋불긋 화려한 국화꽃으로 장식을 하고 초상집이나 고인의 영전에는 노란 국화꽃이나 흰 국화꽃으로 장식한다. 꽃도 꽃이려니와 아마도 그 특출난 국향 때문은 아닌지 싶다. 생각이 이리 미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종이에 노란 국화꽃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매화꽃 그림에 난 그림이 걸린 벽에 함께 나란히 국화꽃 그림도 붙여 놓았다. 해마다 오뉴월 이때쯤이면 친정어머니 살아생전 지내시던 빈집을 둘러보는 게 일이다. 집 마당까지 대나무 줄기가 뻗어 나와 있다. 한나절을 공들여 집 주위를 치우고 나면 대나무 숲속 아래로 여기저기 죽순이 가득하다. 덕분에 나는 죽순을 몽땅 꺾어다가 냉동보관을 해두었다가 명절이나 조상님 기제사 때에 요긴하게 쓰고 있다. 며칠 후면 곧 단오다.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단오날은 작은 명절이라고 해서 동네가 한층 흥겨웠다. 뒷산 언덕 위 큰 소나무 가지에 그네줄을 메어 놓고 그네타기 대회를 열기도 했었다. 그 시절 동네 어른들은 쑥을 말려서 쑥버무리를 만들고 찹쌀을 쪄서 누룩을 섞어 동동주를 만들어 죽순나물로 안주를 만들어 보릿고개를 푸짐하게 넘기곤 했다. 친정 동네는 예로부터 대나무가 많이 자랐다. 대나무가 장인의 손을 거치면 무궁무진한 예술품으로 변신한다. 바구니, 키, 부채, 대자리 등 각종 생활용품으로 탄생해 그 시절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속이 빈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름이 변함없다. 그래서인지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사람을 보고 대쪽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도화지에 대나무와 땅 위에 솟아난 죽순을 어느덧 그려 넣고 있었다. 이리해서 우리집 방 벽에는 모두 네 장의 그림이 걸렸다. 매화꽃, 난, 국화꽃 그리고 대나무다. 남들이 소위 말하는 사군자(四君子), 매난국죽 그림이 제법 어엿하다. 지지난해였던가. 목포대학교 박물관대학에서 작품 소개하는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사군자를 슬라이드를 보여주시면서 강의해 주셨다. 문득 사군자 그림을 조선 시대 누가 제일 먼저 그렸는지 궁금해서 교수님께 물어보았더니 작자 미상이라고 하셨다. 여하튼 나는 매년 매난국죽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비록 미숙한 작품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작으나마 매력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꿈도 함께 그려 넣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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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환승<마음을 여는 시> 환승 배문석 시인 그 곳은 우주였다 대 혼돈의 아수라였다 교차하는 발길이 서로를 비켜가는 질서 그 것은 유기체들의 텔레파시였다 지상으로 지하로 달리는 저 목숨들 오늘은 어디를 휘적이다가 제 몫의 뒤안으로 스며드는가 무수히 스치는 인연들 그 곳은 블랙홀처럼 발길 삼키는 신도림역 심장부 행성으로 가는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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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달래 향기는 돌풍따라<마음을 여는 시> 달래 향기는 돌풍따라 김춘남 시인 스물 셋 스물 넷 허리에 꽂혔던 침들이 뽑혀 나갈 때 나도 모르게 세고 있었다. 등이 휠 것 같은 아픔이 이런 건가? 꽃샘추위를 넘어 돌풍까지 불던 날 달래 무더기를 땅에 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할머니 부슬비까지 더해지니 오가는 발길도 뜸하고 사나흘에 서는 장이 그날은 장날도 아니었다. 사세요~ 말 대신 눈빛만 길게 응시하시던 모습 달래 주세요~ 목젖까지 올라오는 소리와 달래 오이 사다보면 허리에 가해질 통증 저울질 하다 그냥 지나친 발길 한줌 달래의 무게가 등에 허리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 다음 날에도 그 뒤 장날 에도 할머니는 만날 수 없었다 지긋이 바라만 보시던 할머니의 눈빛과 순간 일었던 돌풍이 이제는 서른 개가 넘는 침으로 내 마음에 꽂혀 회오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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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병 전쟁과 전남의병(완)한말 의병 전쟁과 전남의병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일본군 최종목표는 국사봉 <지난 25호에 이어서> 심남일 의병부대는 같은 ‘호남의소’의 산하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구사하였다. 1909년 2월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이다. 덕룡산을 대부분 남평지역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덕룡산 전투는 영암지역으로 살펴야 옳다. 덕룡산 곧 국사봉이 ‘호남의소’의 사령부 기능을 하였고 그 전투에서 활약한 의병장들이 모두 영암 의병들이기 때문이다. 일본군 진중일지를 따르면, 박사화·박민홍·강무경이 인솔하는 250여 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이미 분진한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부대장을 맡고 있던 강무경, 그리고 같은 서리 출신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박사화·강무경·박민홍 부대들이 1909년 6월에도 영암군 북이종면 이목동 등지에서 영산포·나주 분견소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합진을 통해 의병들이 일본군과 불퇴전의 독립전쟁을 치렀음을 살필 수 있다. 3) 심남일 의병 부대의 전과- 심남일 실기를 중심으로 - 남평 거성동 접전 기유(己酉 1909) 3월 8일. 대장 서리 강현수는 박봉주·박채홍과 함께 나주 월교리에서 유진하였다. 이날 밤에 세 의병부대를 남평 운삼동에서 집합하여 선동으로 옮기는데 정탐군이 와서 “왜적 15명이 몰래 운곡(雲谷)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본진은 장암에 머물고, 박봉주·박채홍은 철천에 진을 치고, 박민홍은 선동에 주둔하니 네 진이 서로 4~5마정 사이에 있었다. 정탐군이 와서 적이 출발해서 선동으로 들어갔다 하므로, 이내 군중에 영을 내리어 돌담 밑에 복병하게 하고 적을 유도하여 싸움을 건 결과 겨우 5명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남은 적은 영산포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가 이 소식을 듣고 와 모였기에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하여 감히 포학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낼 수 없은 즉, 여러 개의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만약 숨고 도망하여 각자도생하려 한다면, 이 어찌 대장부가 나라 위해 충성을 바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어찌 이웃 나라에 알릴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하였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이대국·오인수와 동쪽의 안규홍·김여회·유춘신이 일제히 와서 상의하였다. 이튿날 새벽 천기를 살피게 하니 5색의 무지개가 서쪽을 꿰뚫었다. 모사 권택이 점을 쳐보니 점괘에 ‘두 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하였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하여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하여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하여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德龍山)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屛巖峙)에 매복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 8시경. 능주에 있는 적 20여 명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므로 우리 군사가 일제히 사격하여 적 15명을 죽였다. 10시경 광주·나주·남평에 있는 적 60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적의 장수인 경무사(警武師)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 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번 싸움에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그 중 드러난 이는 박여홍(박민홍 아우)·박태환·박기춘으로, 여홍·태환은 박민홍의 좌·우익장이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다. 능주 풍치(風峙) 접전 기유 3월 11일. 장흥 한담리에 유진하고, 장대(將臺)에 비켜 서쪽으로 천기를 바라보니 적병이 오전 10시경 올 것 같으므로 급히 군사를 재촉하여 풍치 바윗돌 사이에 잠복하게 하였다. 열두 고을 왜적 4백여 명이 팔방으로 포위하고 들어와 서로 어울려 격전을 벌여 왜병 백여 명을 죽였으나, 나머지 군사가 물러나지 아니한다. 나는 드디어 징을 쳐서 군사를 8문의 하나인 두문(杜門) 방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동요가 나왔다. “심남일은 용마(龍馬)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 보성 곰재(熊峙) 접전 4월 2일. 장흥 우산에 주둔하였다. 이때 능주 헌병 20여 명이 매달 다섯 차례씩 장흥을 통과하므로 그들이 지나갈 때를 맞춰서 내외 생사 문을 가설하되, 구성(九星)에 응하고 또 8문의 법을 택하였다. 그래서 선봉장 강현수는 일등병 20명을 거느리고 두문 방에 매복하고, 모사 염원숙은 날랜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생문 방에 매복하고, 후군장 노병우는 화포군 2명을 거느리고 휴문 방에서 북을 치기로 했다. 오후 2시경. 적병 15명이 북 울리는 소리를 듣고 곧장 충돌해 오니 각 방위의 복병이 한꺼번에 쏟아져 포를 터뜨려, 적 8명은 당장에 죽고 나머지는 도망해 달아났다. 그래서 대포 2자루와 기타 무기를 다 빼앗아 한담(寒潭)에 돌아와 술을 마련하여 북을 울리며 온 군사와 큰 잔치를 했다. 보성 천동(泉洞) 접전 5월 12일. 천동에 주둔하고, 보성 창의장 안규홍에게 통지해서 석호산에 집합하여 서로 병사를 의논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군장 안찬재와 통장 김도숙을 시켜 백 리 밖에 있는 군량을 운반해 오게 하고, 후군장 김성재와 호군장 강달주를 시켜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며 산상에 깃발을 휘날렸다. 보성의 왜적이 산상의 깃발을 바라보며 50명의 군대가 북을 울리며 싸움을 걸어오므로 여러 장수는 응낙하고 말을 달려나가 접전하여 5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석호산으로 진군하여 안규홍과 더불어 적을 무찌를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모사 염원수는 다음과 같은 시 1절을 읊었다. “이번에는 무난히 싸워 이겼다, 우리 두 진 기세는 웅장도 하군. 저 왜놈 없앨 날이 머지않으니, 하늘이 나라 위해 명장을 냈네.” 이세창은 나와 말했다. “적은 군사가 많은 군사를 당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남·북도 의병이 합세한 연후라야 대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좌우에서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 즉시 여러 의진에 통문을 띄워 연합할 계획을 했는데, 이때 본의 아닌 조서가 한 번 내려 만사는 다 틀리고 말았다. 이 무슨 운명이냐. 하늘을 우러러 통곡한다. 나는 장차 어디로 가리오. 이상 ‘심남일실기’에 있는 전투 일지이다. 여기에 있는 전투상황은 일본 측 자료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전과가 약간 과장되어 있을 개연성도 있다. 그렇더라도 전혀 없는 사실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법하다. 부대의 전투상황 등을 기록한 ‘서기’가 부대 편제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이 의병의 피해 상황은 실제보다 부풀리고 일본군 피해는 거의 축소하거나 누락시킨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볼 때, 양측 기록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심남일실기’ ‘남호찬록’ ‘폭도사’를 통해 심남일 의병부대가 일제와 치열하게 교전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심남일이 이끈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6회나 헌병대,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한대동-장흥 유치 신풍-함평 용진산-함평 석문산-해남 성내-화순 능주-나주 다시-보성 복내-나주 남평-화순 능주-보성 웅치-함평 천동-장흥 장서-영암 금마(해산 1909.7.21) 등 전남 중·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이들의 활동지역은 주로 나주·함평·능주·강진·영암·장흥·해남 등이었다. 이렇게 심남일 부대가 전남의 중·남부를 휘젓고 다녀도 일본군은 추격에 급급할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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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코너> 찔레꽃 추억<구독자 코너> 찔레꽃 추억 김봉임 단비가 그치고 나니 미세먼지 없는 청명한 날씨다. 밭둑 위로 언덕에 쭉 늘어서 있는 찔레꽃은 아롱다롱 꽃망울 이슬을 머금고 있다. 한낮 개화된 하얀 꽃잎들 사이로 스산한 봄바람이 스치면 허공을 날며 떨어지는 꽃잎들, 그리고 내년 요맘때 꽃봉오리 장식하려고 가시로 무장해 우뚝 솟은 새순들은 그 누가 가꾸고 거름을 준 것도 아닌데도 언제나 변함없다. 참으로 자연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작년 가을에 감나무 사이로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뿌려놓은 밀과 보리는 추운 겨울을 견뎌내어 땅속에 뿌리를 폭넓게 내리고 서서 제법 실한 알맹이들을 감싼 꺼시락을 허공에 길게 내밀고 있다. 어쩌다 먼저 고개를 내민 보리목에는 참새들이 그네 타듯 앉아서 아직 여물지도 않은 이삭들을 쪼아 먹고 있다. 옛날 보릿고개 시절 같으면 필사적으로 새들을 쫓아내고 보리를 지키겠지만, 지금은 보리 수확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올가을에 뿌릴 씨앗 거리만 남겨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그저 새들을 바라보고 섰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봄날에 밭 등성을 오를 때면 동백, 철쭉, 보리수 등 어린 꽃나무들을 손에 들고 간다. 그리곤 찔레꽃들이 늘어선 사이사이로 하나, 둘 심는다. 그렇게 하다 보니 누가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름다운 정원인 양 갖가지 꽃들이 어우러져 피고 또 진다. 요즘 내가 즐겨 읽고 있는 책은 <타샤의 정원>이다. <타샤의 정원> 책은 미국의 동화 작가인 타샤 튜더의 정원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수십만 가지 나무와 형형색색의 튤립을 심어 놓은 정원에서 타샤는 나무와 꽃과 열매들을 보며 대화를 한다. 그런 타샤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녀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소망을 글로 쓰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했단다. 글이라면 얼마든지 쓰고 싶은 심정이지만, 타샤의 삶처럼 소망과 행복은 결코 손끝에서 얻어지는 것이리라. 문득 낡고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다가 빛이 바랜 흑백 사진 몇 장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찔레꽃 필 무렵에 당신과 나는 결혼을 했었다. 당신이 예복으로 맞춰준 미니스커트 양장을 입고 제주도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다. 처음 먹어보는 전복죽이 얼마나 맛있던지 한 그릇을 추가해 더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디, 고부량 삼성굴 사적지라고 했던가. 그곳에서 당신은 나더러 절을 두 번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씨도 부씨도 양씨도 아닌데, 왜 절을 해야 하느냐며 꼿꼿이 서 있었더니 당신은 내 정수리 머리를 누르며 억지로 절을 하게 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 바다가 출렁이는 용두암에서 찍은 사진…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웃음이 나오고 가슴 아련한 아쉬운 추억들이다. 전남대 법대를 다니던 당신은 학생 때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한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6년을 항상 1등만 해서 ‘광주 서중’에 들어갔다던 당신은 어릴 때 꿈이 변호사였다고 했다. 사법고시에 낙방한 날이면, 모든 게 술 때문이라며 자책하던 당신은 그래도 술을 끊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 당신은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서인지 법학 서적을 발행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출판사, 박영사에 호남지역 영업부장으로 입사를 했다. 그 시절 당신은 시내 서점가나, 대학 선후배들 그리고 대학교수님들 사이에서 ‘양 부장’이 아닌 ‘술 부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돌이켜 추억을 더듬노라니 당신은 그래도 좋은 남편이었고 좋은 가장이었다고 찔레꽃 추억이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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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투고> 신학기와 봄내음<구독자 투고> 신학기와 봄내음 김봉임 지난 한 해 동안 내내 어두웠던 대학 구내서점에도 봄내음을 실은 남풍과 더불어 생기가 돋아나고 있습니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새내기 학생들과 재학생들이 청운의 꿈을 그리며 교재를 구입하려고 우리 서점을 반갑게 찾아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서점 매장은 학생들로 만원이고 각종 교재가 날개 달린 듯 잘 팔리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19 때문에 학생들이 마스크는 잘 쓰고 있는지, 서로 거리 두기는 하는지 등이 마음에 걸리고 좀 불안하기도 합니다. 벌써 계절은 춘분을 지나 청명 한식입니다. 들녘을 보면 농부들의 봄맞이 일손에는 오곡의 씨앗들과 모판을 준비하느라 돌아올 풍년을 기약하면서 이리저리 서두르는 모습이 정겹기까지 합니다. 저도 일곱 살 아래인 남동생의 도움을 받아 친정 아버님이 오랜 세월 사용하시던 농기구(트랙터)로 약간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벼 낟알들은 정미소를 거쳐 하얀 쌀로 변신하여 마대자루에 담아져 우리 집 거실 가득히 쌓입니다. 그럴 때면 향긋한 쌀내음 향기에 취해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고 삶이 여유로워지기도 합니다. 벼농사로 수확한 쌀은 아들 집에도 딸 집에도 보내줍니다. 그리고 시댁 쪽으로는 제주 양씨 종갓집 장손이기에 해마다 돌아오는 기제사와 명절 차레에도 쌀의 쓰임새가 많아 양식으로 넉넉하게 보관합니다. 공교롭게도 시아버님의 기일은 제 생일날과 같습니다. 제 생일날이 바로 시부모님 기일이 된 것입니다. 너그러우신 시부모님은 제게 조상님들의 제사를 잘 기억하라고 명을 주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꿈에 시아버님이 생존해 계실 때처럼 회색 바지에 베이지색 점퍼 차림으로 미소를 지으시면서 제 손에 신문 뭉치를 놓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신문 뭉치를 펼쳐보니 새 동전이 한 다발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을 꾼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집안에 재물이 들어오고, 그런 꿈을 꿀 때면 꼭 좋은 일들이 생기곤 하는 것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벼는 사람들의 양식이 되고 또 볏짚이나 벼 껍질은 소의 여물이 되거나 거름이 되어 토지의 자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책 또한 인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 하겠습니다. 책이 있기에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덕을 길러낼 수 있겠지요. 작고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도 많은 책을 닳고 닳도록 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심지어 옥중 생활 속에서도 책을 늘 가까이 두시며 읽고 기록을 남기고 하셨다지요. 그러고 보면 책은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위인을 만들기도 하고 역사를 기록하고 과학 문명을 발전시켜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코로나 19가 심해서 대학 구내서점은 책 한 권을 제대로 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 3월 신학기부터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어서인지 대학 교재들이 잘 팔려나가서 삶의 생기가 돋아나는 듯합니다. 책을 만지는 제게도 봄내음 가득 실은 남풍이 불어왔습니다. 논농사와 책방을 병행하는 저는 지난날의 이기적인 생각들을 이제는 조금이라도 떨쳐버리고 ‘벼’와 ‘책’처럼 남을 배려하며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겠노라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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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장난 (배문석 시인)소꿉장난 배문석 시인 놀고 즐기고 숨쉬는 게 누구나 쉬운 일이 아니다 나노미터보다 더 작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인간들은 미증유의 길을 가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 그런 길을 가고 있다 산다는 게 그렇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가 전부였듯이 삶은 다 그렇게 흘러 왔고 연륜 또한 거침없이 그렇게 달려간다 해 뜨고 지는 억겁의 하루가 어디 어김이 있으랴 그 날줄 위에 함부로 디뎌서는 안 될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길을 가고 있다 사금파리 위로 빛나던 그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