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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특집>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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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역사 특집>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

박해현(문학박사, 마한역사문화연구소장)

<역사 특집>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

박해현(문학박사, 마한역사문화연구소장)

 

(지난 33호에 이어서)

1910년 국권 강탈 직후부터 일제가 광주·전남 지방민의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당시 헌병 경찰 규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3·1운동 당시 전남지역은 1부, 1도, 21군의 행정구역으로 21개소의 경찰서가 있었다. 269개 면 가운데 경찰 주재소가 128개소로, 주재소 당, 평균 두 개 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경찰·헌병 1인 담당 숫자가 약 1천750명 정도였다.

경남의 경우 당시 257개 면 가운데 주재소가 81개소로, 주재소 당, 3개 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황해도는 경찰·헌병 1인당 3천629명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전에 광주·전남 지역에 대한 치안력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강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말 의병의 전통이 남아 있고, 독립의군부와 같은 무장 결사 조직이 잉태되고 있었던 이 지역의 특성과 관련이 깊다 하겠다.

이렇게 다른 지역보다 강력한 치안력을 유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격렬한 시위를 감당하지 못한 헌병대는 진도 경찰서 신설을 비롯하여 주재소가 없는 138개의 면에 주재소 설치와 600명의 대규모 경찰 인력의 증강을 건의하고 있다. 이 지역의 시위가 얼마나 대규모였는지, 그리고 격렬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편, 헌병대에서는 수비대 배치를 현상 유지하고, 경찰이 경계 태세를 철저히 해도 불온 문서의 게시, 유언비어 유포, 사상 고취자의 배회 등 다양한 수단의 독립운동을 막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는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억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자인한 것이다. 광주·전남인은 그들의 '민족성'으로 보아 온건책은 시간만 끌 뿐 효과가 없으니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 진압을 하여야 한다는 헌병대의 보고서에서 지역민의 강렬한 독립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시위가 소강상태인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독립의지가 더욱 강해진 광주·전남 사람들이, 일본 관리나 일본인들에 대해 함부로 대하거나 멸시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고 분석한 부분에서, 3·1운동 후 이 지역민들이 사실상 독립국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3·1운동에 앞장선 광주·전남 종교인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은 손병희 등 천도교 15명, 이승훈 등 기독교 16인, 한용운 등 불교 2인으로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었다. 광주·전남 지방에서도 종교계 인사들이 시위를 촉발하고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전남 지방의 기독교도의 주모에 의한 소요가 총 건수의 약 5할로서 그밖에는 종교 관계자의 '주모'가 원인이 된 것이 없고, 기독교도의 관계가 가장 깊다"라고 헌병대 사령부 작성한 '조선소요 사건 상황' 보고서에서 잘 드러나 있다.

3·1운동에 참여한 종교인들만 놓고 볼 때 헌병대 보고서대로 기독교인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분명하다. 독립운동편찬위원회가 작성한 『독립운동사』에 정리된 광주·전남 지역 3·1운동 관련 종교별 기소자 수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광주본청의 경우 기소자 139명 가운데 58.3%인 81명, 목포지청의 경우 69명 가운데 26.5%인 17명, 장흥지청의 경우 89명 가운데 9%인 8명 등이 기독교인이었다. 여성 기소자 30명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다만 순천지청의 경우 43명 가운데 기독교는 없고, 천도교가 15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의 시위를 천도교계가 처음 이끈 것과 관련이 있다. 기소자 340명 가운데 기독교 106명(31%), 천도교는 18명(5%), 무종교 209명(61%)으로, 기독교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겠다.

이처럼 광주·전남 지방에서 기독교인들의 시위 참여가 많은 것은 헌병대 보고서에 있는 것처럼 시위에 참여한 기독교도들이 학력이 높고 젊은 층이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 하겠다. 곧 광주나 목포의 첫 시위를 이끈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와 목포의 영흥학교·정명여학교 등이 기독교계 학교였다. 하지만 이들 학교 교사나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광주·전남 지방의 기독교계 시위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8년 광주·전남지방에는 166곳의 교회와 10,260명의 교인이 있었다. 『독립운동사』, 『한국기독교회사』등 여러 자료에 나와 있는 광주·전남 시위 주도 세력 자료에 의하면 제주도를 포함한 23개 지역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한 곳은 시위가 불발된 고흥까지 포함하여 12개 지역으로 52%를 차지한다. 시위 일수도 시위가 불발된 고흥·순천·장성까지 포함하면 총 시위 일수 91일 가운데 약 20일로 22%이다. 기독교인들이 시위 지역의 1/2, 시위 일수의 1/4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분석 자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시위 참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3월 15일 영광·화순·완도에서 기독교인들이 시위에 참여한 것이 그나마 가장 많은 사례인데 이들 지역은 서로 인접한 곳도 아니어서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이 지역 기독교계의 3·1운동은 지역적으로 유기적 관계를 갖지 못한 채 분산적·고립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 각지 기독교인들이 시위할 때 다른 지역 기독교인들과 연락을 한 경우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지역은 고사하고, 같은 지역 교회끼리 연합을 하여 시위를 준비한 사례도 3월 10일 광주에서의 시위를 제외하면 없다. 기독교인들이 자체적으로 선언서를 만든 경우는 있어도 외부로부터 선언서를 반입한 사례도 드물다. 이는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을 유기적으로 묶을 수 있는 지도력이 없었음을 뜻한다. 실제 광주·전남 지방에서 3·1운동 시위로 처벌받은 기독교인들의 90% 정도가 목사·장로·조사가 아닌 평신도였다. 이는 이 지방 시위가 평신도들의 적극적 참여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교회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참여가 부족했음을 말해준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수원의 제암리 교회처럼 일제가 파손한 교회가 보고되지 않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 한다.

3·1운동 당시 조선 천주교는 시위에 부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신도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선교에 주목을 둔 교회의 입장에서 총독부와 맞서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은 너무나 소중하고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천주교 신자들은 타 종교와 연합을 하면서까지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기독교 또한 이러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를테면 광주·전남북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한 남장로파 역시 '미국인 선교사는 포교를 위해 순시하는 데 불과하며 소요 발생 후에는 관내에 온 일이 없고, 태도도 온순하다'는 헌병대 보고서 내용처럼 시위에는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 남장로파 선교사들은 스스로 조선인 후견자로 자임하면서도 그들이 경영하는 학교의 학생들이 시위하는 데도 이를 제지 단속하려 한 사실이 없고, 항상 원조적 의미로서의 방관적 태도를 취하였다.'라는 전남 지역 헌병대의 '짜증 섞인' 보고서가 주목된다. 말하자면 광주·전남 지역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시위에 교회가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않았지만, 신도들의 참여를 막지도 않았다. 교회 차원에서는 나서지 않은 채 신도들의 시위 참여를 묵시적으로 동의하였다. 선교사들과 접촉하며 개화의식이 깃든 일반 기독교인들은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 정세를 읽으며 앞장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광주·전남 지역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는 많은 일반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전남 헌병대의 '일반 대중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민족 운동의 선두에 섰음을 감사하고 존경을 더하게 되었다'라는 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보여준다. 곧 기독교인들의 처절한 활동은 3·1운동 후에 신도 수가 급증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광주·전남 지방의 교회는 1919년 6월 조직된 '국민회'라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단체에 다수 기독교인이 참여하는 등 일부 신도들이 항일 운동의 열기를 이어가기도 하였지만, 시위 후에는 오히려 선교·신앙적인 측면에만 치우쳐 독립 열기를 조직화하지 못한 한계도 적지 않게 드러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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