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삶의 나들목> 유머의 본질과 사회언어적 기능
윤창식(논설위원, 외국어교육학박사)
유머(humor)의 어원은 인간의 기질과 성격을 형성하는 4가지 체액(혈액, 점액, 황색쓸개즙, 흑색쓸개즙)을 의미하는 'humores'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humores는 본래 습기(물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딱딱한 각질을 용해시킬 수 있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생리적 용어를 18세기 영국의 언어학자들이 경직된 인간 관계와 편협한 현실의 벽을 깨뜨릴 수 있는 대체물로 변환시켜 오늘날의 유머 개념으로 정착시켰다.
미국의 전설적인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기원 전 2세기 고대 로마에서 이미 희비극(tragicomedy)이라는 문학 장르가 생겨났다는 점을 고려할 때 희극과 비극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유머는 단순히 웃기는 기능을 넘어 인간 세상의 희비극적인 현상을 기막힌 언어 기술로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젊었을 적부터 추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문호 괴테, 천재음악가 모차르트 그리고 자신의 소설 <싣달다> 말미에 등장하는 뱃사공(바주데바)의 웃음을 '영원한 미소'(ewiges Lächeln)라 칭하면서 그런 미소는 참다운 인간이 고뇌와 죄악, 미망과 오해 사이를 빠져나와 영원 속으로 나아갈 때 나오는 웃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런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인물은 이미 입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붓다의 염화미소와도 맥이 통한다. 헤세가 동양사상 특히 인도의 불교사상에 심취했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황야의 이리>라는 소설은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일반 시민이 영원히 변치 않는 어떤 초월적 경지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상징하고 있다.(저 높은 곳에서 말없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차르트를 상상해 보라.)
이런 점에서 유머는 억지 웃음을 유발하는 개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보통사람의 일상 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국가원수끼리의 정상회담에서도 유머의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프랑스의 카톨릭 사제 겸 고생물학자 T.D.샤르망은 "유머는 한 인간의 세계관이 담겨있다"라고 말한다. 지나친 용어이기는 하지만, 교수대에 매달려서 부리는 익살(Galgenhumor)까지 있을 정도이므로 유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하지만 최근의 대한민국은 여러 권역에서 유머를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고려가요나 판소리 사설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우리 민족의 언어적 DNA에는 유머와 풍자와 해학적 기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지 않았던가!
특히 정치권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수많은 논쟁거리를 쏟아내면서도 유머러스한 말의 행태는 찾아보기 어렵고 살벌한 쟁투적 언어만 난무한다. 나아가서 양 진영을 지지하는 각종 SNS 상에서도 유머스러운 논의나 주장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확증편향과 자기모순의 말잔치를 벌이고 있다.
물론 현대사회가 정치적 이념 뿐만 아니라 갖가지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얽히다 보니 선뜻 어느 한 쪽이 양보라는 미덕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상대방을 설득하는(설복이 아니라) 기술로서의 유머의 기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상 생활에서건 거대담론의 자리건 우리는 유머를 되찾아야 한다. 물기와 재치가 넘치는 유머는 개인의 생리적 심리적 건강성을 담보해줄 뿐만 아니라 온사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명이 깃든 언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