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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식 박사의 엽편소설> 하얀 미소

기사입력 2024.03.0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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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창식

     

    한풍일과 윤미선은 한마을에서 나고 자란 동갑내기다. 풍일과 미선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고만고만했으나 풍일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미선은 글짓기를 잘했다. 봄날이면 둘은 마을 언덕배기에 앉아서 각기 자기 소질 대로 화가와 선생님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다짐하곤 하였다. 풍일은 미선이의 미소가 하얀 삐비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늘 붙어다니던 두 친구는 중학교를 마친 후 윤미선은 K시 J여고에 진학하였으나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한풍일은 가정 형편 때문에 고교에 다니지 못하고 청자가마터 화공(火工) 보조로 가게 되었다. 그래도 풍일은 꿋꿋하게 일을 하다 보면 가마터 아궁이에 불을 때는 화공을 면하고 청자에 초벌그림을 그려넣는 화공(畵工)을 넘어 언젠가는 화가가 되리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윤미선은 문예반 선생님의 추천으로 청자문화제 백일장에 참가하여 '화공'이라는 시작품을 써내어 고등부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불아궁이 곁에서 꿈을 키우는 어린 친구의 치열한 삶을 구김살없는 시어로 훌륭하게 형상화했다는 심사평을 들으며 미선은 풍일과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풍일과 미선은 백일장이 끝나고 모처럼만에 탐진강 강둑을 함께 걷다가 어렵게 말문을 먼저 연 쪽은 미선이었다.

    "화공이라서 손이 따뜻한 걸까?"

    "뜨겁지는 않았나?"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저리는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드디어 한풍일과 윤미선의 꿈은 무르익어서 미선은 국어교사가 되어 고향의 중학교에 발령을 받았고 풍일은 그동안 근근히 모은 돈으로 고교검정고시를 거쳐 뒤늦게 미술대학 입학을 앞두게 된 것이다.

    "자네는 본래 왼손잡이인가?" 미술대학 지도교수가 묻는다.

    "아닙니다. 어릴 적에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오른쪽 손에 심한 화상을 입은 후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 사연이… 그래도 가상하구먼. 자네 그림이 참 좋거든."

    미술대 캠퍼스 잔디에 앉아 꿈만 같은 봄날을 잠시 만끽한 후 학과 사무실에 들른 풍일은 학과 조교가 건네준 미선의 편지를 뜯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미선의 편지 내용은 풍일의 예상을 빗나갔다. 삼거리 출신 중학교 동창놈이 미선의 학교로 시도때도없이 전화를 해대는 바람에 위신이 말이 아니라는 하소연이었다. 그 녀석은 술도가집 아들내미인지라 일찍부터 술께나 퍼마시며 칠색조라는 별명으로 순진한 처녀를 꼬드기며 돌아댕기는 놈이 아니던가.

    말로는 될 놈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풍일은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시골로 향했다.

    "어쭈구리. 외팔이 화가시구만."

    "뭐여? 나 외팔이는 아니거든."

    그날 풍일은 그 녀석이 미리 동원해놓은 패거리에 둘러싸여 몸부림치다 누군가 휘두른 칼에 왼손을 찔리고 말았다.

    왼손마저 장애가 생긴 한풍일은 결국 미술대학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꿈을 키우던 청자가마터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세밀한 그림 붓은 마음 대로 손에 잘 잡히지 않았지만 풍일은 투박한 양손으로 장작개비를 불가마 속으로 던져넣으며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을 떠올렸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한풍일은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듯 흘러간 시간 속에서 비록 그리고 싶은 그림은 그리지 못했으나 윤미선의 사랑은 얻을 것 같았다. 탐진강 강둑엔 미선의 하얀 미소 같은 삐비꽃이 하얗게 피어나는 늦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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