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화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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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서평> 우리 성서화 투어 한번 해볼까요?<남악 서평> 우리 성서화 투어 한번 해볼까요? 김현철(초당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김학철 저 | 비아 | 2022년 8월 15일 | 강(river) 위의 ‘다리’(bridge)는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인 것이 맞지만, 그것은 강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고, 전에는 익명의 존재였던 강 건너편 사람들을 이웃으로 ‘드러나게’도 해준다. 기술! 그것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든 도구이지만, 동시에 숨겨진 진리가 드러나는 통로, 혹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한 방식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1950년대에 위와 같이 독특한 방식으로 기술에 관해서 탐구했다. 기술이 예술의 차원으로 승격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통찰하고 있는 그의 기술철학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은, 필자가 그렇게도 어렵게 생각했던 예술, 미술에 대하여 어렴풋하게나마 관심을 두도록 만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수채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작품에 관해서 설명하는 칼럼들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리의 풍경을 화폭에 ‘드러낸’ 수채화가 왠지 아름답게 다가온다. 마치 감추어졌던 ‘진리’가 필자에게 드러난 것처럼, 그것이 거리의 진짜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서 속에 감추어진 진리를 깨달아 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서의 시각적 읽기’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한다. 책의 본문에서는 그러한 읽기 방식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성서의 본문을 가지고 성서화를 감상하고, 성서화를 통해 말씀을 읽는 시도이다. “성서를 이미지로 해석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성서와 예술 작품을 서로 새롭게 읽으려는”(19) 시도, 성서를 좀 더 유연하고 풍요롭게 읽기 위한 시도가 바로 성서를 시각적으로 읽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성서화에 나타난 화가들의 신학을 더 자세하게 살필 수 있고, 성서화를 그린 화가들의 통찰을 통하여 성서 속의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이 그 영감을 가지고 온 책, 니콜라스 월토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는 현실에서는 조화될 수 없는 기독교적 희망이 종말에서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와 달리 이 책은 이미 예술과 성서의 만남이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제목에서 차별되게 강조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신, 혹은 기독교인들의 표현을 사용하면, 임재하는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런 인간의 모습을 어여삐 여기고 다가오는 신, 그들 사이의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만남, 그것을 성서와 성서화로 표현하고자 책 제목을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로 정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에서 ‘성스러움’은 성서를, ‘아름다움’은 성서를 주제로 한 성서화를 지칭한다. 기독교인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떻게 해야 신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에 대한 여정을 통하여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 그것이 결국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첫 작품을 바로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로 정한 것도 바로 이런 여정의 도착점이 어디이어야 하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 이후 계속되는 여정은 성서를 화폭으로 그려냈던 사람들의 시선으로 말씀을 담아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드러나는’ 그들 자신의 허물에 주목하고 회개하여 결국은 신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이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종국에 신의 형상으로서 살아가기를 향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삶의 신앙-예술적 형상화다. 성서 본문을 시각화하고 나아가 예술화하려는 노력은 우리 삶을 시각화하고 나아가 신앙-예술화하려는 것으로 향한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신앙-예술품으로 조형해 나가려는 것이다.”(34)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은 신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이 책은 강조한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허물이 ‘드러났을’ 때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성서를 통하여 드러나는 자신의 허물, 그것을 ‘신앙-예술적’으로 만들어 내려는 기나긴 여정에 관한 이야기! 기독인 여부를 떠나서 그 이야기에 동참해 볼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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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이야기 문학] Ⅲ. 창작 이야기(3)[기획 연재 : 이야기 문학] Ⅲ. 창작 이야기(3) 조수웅 문학박사 그런 이유로 상상력은 작가 정신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글쓰기는 상상력을 통해 현실 너머의 세계를 구현해 준다. 상상력의 빈곤은 작가 정신의 부재에서 생기거나 작가 정신의 부재를 초래할 뿐이다. 누구나 생각하고 느낀 것 말고 다른 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누가 그 작품을 읽으려 하겠는가? 상상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미루어 그리게 함으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글쓰기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틈을 메꾸고 그것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상상력이야말로 글을 쓸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미루어 그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기억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나 경험 없이 상상력이 따로 존재할 수 또한 없다.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사물이나 현상을 전제하지 않고 상상력을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 혹은 경험으로부터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상력은 그 경험의 범주에서 나오는 것이다. 경험을 발판으로 유추한 상상이 바로 문학적 상상력 즉 창조적인 생각에 해당된다. (4) 충분한 독서 또 충분한 독서가 필요하다. 창작을 하기 위해,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관찰과 상상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쩌면 관찰과 상상력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독서만한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서는 감각적인 매체인 영화관람 등과는 달라서 집중적이고도 활발한 정신활동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유(思惟) 없이 독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독서를 많이 할수록 간접 경험(아나톨 프랑스는, 내가 인생을 안 것은 사람과 접촉한 결과가 아니라 책과 접촉한 결과라고 말한다.)이 늘고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또 실제로 창작을 위한 글감 찾기 측면에서도 풍부한 독서는 필수다. 따라서 독서는 창작의 선행 조건이면서 글의 질과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작가와 대화하듯 작품을 읽으면서 새로운 맥락에서 해석하기, 작품의 비판적 수용에 이어 작품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내용과 형식ㆍ표현의 요소를 바꾸어 재창조하기, 작품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 우한용 외<문학>) 2) 무엇을 (1) 발상 창작은 글감이나 제목을 주고 ‘~에 대해 써라’는 식의 글이 아니고 작가가 쓰고 싶어서, 스스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충동에서 나온 것을 그대로 쓰면 된다. 이때 발상이 중요하다. 모든 창작품은 반드시 발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씨앗이 좋아야 튼튼한 나무로 자랄 수 있듯이, 발상이 좋아야 튼실한 글이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발상이란, 이것이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나 단서를 말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르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이걸 써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행에서 겪은 어떤 일이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하고, 신문 한 귀퉁이에서 읽은 어떤 기사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중에, 혹은 음악을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중에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다. 화장실에서 만원 버스 속에서, 심지어는 꿈에서 깨어난 직후에 그런 단서가 떠오를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의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통해 창작의 씨앗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발상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특별한 것을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하는 눈을 갖는 일이다.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이 다 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착상의 단서를 잡아내는 일이다. 그러자면 늘 호기심과 관심을 유지해야 한다. 거미줄을 친 거미만이 잠자리를 잡는다. 많은 잠자리가 공중에 날아다니지만 아무 거미나 다 잠자리를 잡는 건 아니다. 거미줄을 친 거미만 잠자리를 잡는다. 깊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만이 좋은 글의 씨앗을 찾을 수 있다. 소설가 이청준은 그것을 일종의 방전 현상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작가가 체험이라든가 독서, 대화 등을 통해 대전(帶電) 현상을 유지하고 있을 때 주변의 어떤 삶의 현상들이 충돌을 하고 방전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영감처럼 떠오를 때가 많다. 우리의 머리 속으로는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매우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감처럼 떠오른 것들은 또 그만큼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뭔가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올라서 흡족해 했다가 나중에 그것을 되살려 보려고 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속상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착상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평소 아이디어나 자료를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언제든지 메모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가지고 다닌다. (2) 재료 무엇을 쓸 것인가? 그 무엇이란 소재일 수도 있고 주제 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발상이 떠올랐다는 것은 바로 그 ‘무엇’을 확보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창작의 바탕이 되는 재료가 소재이고 그 소재는 사물, 현상, 사건 등 무한하다. 주제는 소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중심 생각이다. 일단 소재가 있어야 창작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비로소 창작은 시작된다. 이때 작가의 세계관이 주제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되고, 글의 내용도 결정한다. 그렇다고 작가는 사상가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작가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구체적인 사건이나 이야기 속에 녹여(내면화 시켜)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또 소재는 하나라도 주제는 여럿일 수 있다. 즉, 같은 소재를 갖고도 작가의 의식과 의도에 따라 전혀 다른 주제를 드러낼 수 있다. 결국은 주제에 따라 제재가 달라질 수도 있고, 제재에 따라 주제가 바꿔질 수도 있다. (3) 주제 정하기 이제 주제 정하기 문제를 생각해보자. 옛날 폐르샤의 마샬 왕이 늙고 병들어 죽을 임시에 만조백관을 불러 모아 ‘인생이 뭔가’를 알아오도록 명하였다. 박학다식한 신하들만 모여, 몇 날 며칠을 연구한 끝에 50권의 책을 만들어 왕께 바치자, 왕은 화를 버럭 내며 늙고 병든 내가 어찌 50권의 책을 읽을 수 있겠냐고 나물했다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단 한권의 책으로 압축해서 왕께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왕은 또다시 화를 내며 비록 한 권일망정, 어찌 다 읽을 수 있겠냐고 호통을 치자, 마침내 신하들은 ‘인생이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 것이다.’는 한 줄로 줄여왔다고 한다. 그때서야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기었다고 한다. 주제는 잘 아는 것 중 쉽고 작게 정해야한다는 단적 예이다. 그 밖에도 주제는 독창적이어야 한다. 창작의 생명은 참신성이다. 독특한 소재가 창작의 좋은 재료인 것은 틀림없지만, 중요한 것은 독특한 소재에서 찾아낸 참신한 주제다. 따라서 소재가 없어서 창작을 못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가까운 곳에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독창적인 소재가 아니라 독창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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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명구 100선>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논어 명구 100선>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자왈: "인지생야직, 망지생야행이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정직이다. 그것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이다." 1) 人之生也直(인지생야직): 사람의 삶은 정직하다. 정직이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 之(지): 주어와 술어 사이에 쓰여 주술구조로 하여금 독립성을 잃고 명사구 또는 절이 되게 하는 구조조사. • 也(야): 음절을 조정하고 어기를 고르는 어기조사. 2) 罔之生也幸而免(망지생야행이면): 그것이 없이 사는 것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이다. • 罔(망): 없다. • 之(지): 直(직)을 가리키는 인칭대사. • 也(야): 음절을 조정하고 어기를 고르는 어기조사. • 幸而(행이): 요행히. • 而(이): 부사 접미사. 然(연)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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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무인도<마음을 여는 시> 무인도 박일훈 시인 한사코 무인도에 가고 싶어 하는 그녀, 달이 야위어 가면 마치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목이 탄다는 그녀, 불빛조차 없는 그곳에서 잘방대는 물결소리와 풀벌레소리에 귀를 맡기고 어느 행성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어보고 싶다는 그녀, 열이레 푸른 달빛 아래 가녀린 어깨가 안쓰러운 그녀가 평형을 잃은 새끼 갈매기처럼 불안한 발자국을 남기고 바다 쪽으로 걸어간 후 바다는 잠시 몸을 뒤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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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안내>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히브리어 번역성경 『창세기』 출판<신간 안내>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히브리어 번역성경 『창세기』 출판 히브리어&헬라어 번역 출판사의 박경호 원장이 20여 년이 넘게 순수번역 순수진리 탐구만을 목적으로, 끈질긴 노력과 연구 끝에 완전 직역에 성공하여 2022년 10월, 박경호 히브리어 번역성경 『창세기』를 출판하였다. 이번 창세기 출판은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NEW 4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로마서에 이은 7번째 직역 성경이며, 준비부터 출판까지 3년 8개월이 소요된 역작이다. 박경호 히브리어 번역성경은 벤카임 맛소라 사본을 원전으로 하여 온전히 한글로 1:1대응 원칙에 따라 번역했다. 1:1 한글 대응 번역은 세계 최초로 박경호 히브리어 & 헬라어 번역성경만의 독특한 번역방식인데, 원어 한 단어가 쓰인 수백 건의 용례들을 비교 분석하여 모든 문장에 들어맞는 한 단어를 원어의 의미에 부합되는 단어로 판단하여 그 단어를 번역된 한글 한 단어로 정의 내려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식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우리 말을 만들어 전체 성경에 적용된 단어들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한다. 이것이 1:1 한글 대응 번역이며 박경호 히브리어 & 헬라어 번역성경은 어원을 분석하여 원뜻을 밝혀 보임으로써, 기존의 성경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진리의 구절들을 발견하여 원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와 같은 믿기지 않는, 이제껏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이 이 성경을 읽으시는 누구에게나 놀라운 흥분들로 다가올 것이고, 기존에 창세기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창세기가 이런 내용이었어?’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처음 창세기를 접하시는 일반인들도 쉽고도 흥미진진한 내용에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박경호 히브리어 번역성경 창세기는 고어체와 서술체가 아닌 경어체와 대화체를 사용하였으며 문장에서 자연스러운 의미를 고려한 의역이 아닌, 부자연스럽고 어색하지만 있는 뜻 그대로를 직역하여, 읽는 분들이 마치 스크린을 보는 듯 생동감 있게 원문의 원래 의미가 최대한 전해지도록 했다. 역자 박경호 원장 (히브리어 & 헬라어 번역원 원장, 예장 합동 사복음교회 담임목사)은 20년 넘게 원어 번역에 매진한 원어 성경 연구가이다. 서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후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나 영어 성경과 한글 성경의 많은 오번역들을 발견하고서 성경 원어에 관심을 가지고 되었고 현재 원어성경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박경호 원장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영역으로서 번역을 진행했으나 현재는 전세계 성도들을 위하여 원어에 가장 가까운 성경을 만들고자 하는 사명자로서의 영역으로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박경호 원장은 "향후 박경호 히브리어 번역성경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사도행전, 로마서, 바울서신, 공동서신을 박경호 히브리어&헬라어 번역성경을 영어 및 전세계 자국의 언어로 번역 출판하여 복음전파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라면서, "전무후무 박경호히브리어번역성경 창세기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다”라고 전했다. 문의사항은 전화번호 010-8595-5725이나 또는 이메일 dycjf5725@naver.com로 연락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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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서평> 머릿속에 도서관이 통째 들어 있던 독서가!<남악 서평> 머릿속에 도서관이 통째 들어 있던 독서가! 김현철(초당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책 읽는 삶』 C.S. 루이스 저/윤종석 옮김 | 교양인 | 2021년 7월 14일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던 말씀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젊을 때, 건강할 때 체력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말씀들이 필자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기에 『욥기』의 문학적인 향취가 어떠한지 알 도리는 없지만, 최근 몇 개월 동안 시가 문학서인 욥기서를 묵상하면서, 그리고 거기에서 묘사된 바다, 노을, 비, 이슬, 얼음, 서리, 구름, 천체, 별, 그리고 동물들에 대한 구절을 읽으면서, 욥기서가 문학적으로 참 아름다운 글일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동화책이 주는 상상력을 동경하고 있는 지금, 어렸을 때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가 몰려듦과 동시에,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감성이 묻어나는 책들을 지금 이 나이(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에라도 읽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소설가 이명행 씨가 쓴 소설 『대통령의 골방』의 모티브가 고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직접 농부들과 함께 농사를 짓던 그 감동적인 너른 들판, 점퍼 차림에 밀짚모자, 정말 홀가분한 모습’의 노 대통령을 만났던 그 순간을 생생한 기억과 함께 인상적으로 회고한다. 그리고 그는 현대인들의 ‘세 가지로부터 소외’를 언급하고 있는 리 호이나키의 책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안타까운 마음에서 언급한다. ‘손으로부터의 소외’는 우리 삶이 머리 중심의 세계로 바뀌며 손노동, 육체노동으로부터 분리된 현실이며, ‘시로부터의 소외’는 낭만과 감성은 저만치 물러가고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현실 지향적 삶을 살면서 문학으로부터 소외된 로봇과 같은 상황이며, 그리고 ‘장소로부터의 소외’는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했던 그 고향과 같은 기억의 장소가 온통 아파트와 같은 주변 건물로 인해서 사라진 슬픈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너른 들판’에서 ‘농사’ 를 짓고 있는, 이 씨의 노 대통령에 대한 회상의 모습은, 어머님 품과 같은 고향, 손노동의 소중함, 시적인 감성에 대한 아름다운 가치를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 세 가지 소외가 극복된 희망의 광경처럼 보인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나니아 연대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 그동안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과 감화를 끼쳐왔던 C.S. 루이스의 저작 중에서 특별히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에세이, 편지 등에서 삶의 변화를 낳는 독서 행위에 대한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동시에 ‘어른들의 마음의 고향인 동화에 대한 꿈,’ ‘신선한 숨을 내뿜는 문장의 숲을 이리저리 뛰놀며 만나게 되는 동물들과의 놀이’ 그리고 ‘시’가 있는 이번 작품을 통해 위 세 가지로부터의 소외가 극복된 삶에 대한 소망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책 속의 목차, 예를 들면, "요즘 책과 옛날 책을 번갈아 읽어야 한다,” "동화,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다,” "재미로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문학 읽기를 중심으로 독서 생활 전반에 대한 루이스의 흥미롭고 다채로운 지혜를 담고 있으며, 독서욕을 공유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재미있고 기발하고 지혜로운 글들을 루이스의 저작에서 엄선한 것이다. 필자에게 인상을 주었던 대목들을 본문에서 몇 개 발췌해본다. "자고로 편지를 쓰는 이들의 특권은 차마 말로 하지 못할 부분까지 지면에 옮기고, 말보다 웅장하게 글에 담아내며, 자칫 대화 중에 놓치고 지나갈 감정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네.” ("편지 쓰기에 좋은 점” 155쪽/친구 아서 그리브즈에게 보낸 편지 1914년 11월 10일) "태초에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과 천사와 (본래 상태의) 동물의 즐거움을 위해 위대한 상상력으로 자연계 전체를 고안하여 빚으셨고, 굳이 자신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셨다. 이때 그 언어가 때로 시(詩)로 터져 나온 것은 내 생각에 적절하다 못해 거의 불가피해 보인다. 시 또한 이전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에 몸을 입혀 주는 작은 성육신이기 때문이다.”("시, 작은 성육신” 164쪽/ 시편 사색, 1장 "들어가는 말”) 그리고 친구 아서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묘사한 루이스의 책에 대한 그 극진한 사랑에 대한 아래의 표현도 역시 음미해보시라! "형과 나는 사다리를 결딴내고도 태연할 수 있었지만, 책에 손때를 묻히거나 귀퉁이를 접는 것만은 못내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아서는 책을 아끼는 정도가 아니라 책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지면의 구성, 종이의 감촉과 내음, 지질에 따라 다르던 책장 넘기는 소리 등이 감각적 즐거움이 되었다.”("책의 바다에서 성장하다” 70쪽/예기치 못한 기쁨, "운명의 미소”) 이 책을 기획한 다우닝과 모들린은 책 출판의 목적을 이 땅의 모든 문학 작품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일깨우고 읽는 즐거움의 깊이를 더해 주고자 함이라고 쓰고 있다. C.S. 루이스의 위트와 지혜를 들여다보는 이 새로운 창이 당신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동시에 이 책의 부록에 나와 있는 항목을 통하여, 자신의 독서 생활을 진지하게 점검하는 즐거움(창피함?) 역시 함께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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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Ⅲ. 창작하기(3){기획 연재} Ⅲ. 창작하기(3) 조수웅 문학박사 <지난 38호에 이어서> 3. 창작하기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헤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만났다. 그때 ‘남자가 너 보고 싶은 마음에 내 가슴이 다 타내려갔어!’라고 말하자, 여자가 부엌으로 가서 물 한 바가지를 들고 와 남자 가슴에 끼얹고 나서 ‘이제 괜찮니?’ 하였다. 왜 이 청춘남녀는 동문서답을 했을 까? 의사소통의 생명은, 사실이나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에서는 객관성이나 정확성이고,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는 글에서는 논리와 설득이다. 그러나 문예 창작은 이와는 달리 감동을 주거나 공감을 얻기 위해 정서에 호소한 글이다. 따라서 돌려 말하거나, 낯설게 말하고,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 비유나 상징 등의 기법을 활용한다. 다시 말해 독자의 정서를 환기시켜 심미적 가치를 일깨워 준다. 다음의 ⒶⒷⒸ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 창작이란 (처음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으로) 예술 작품을 독창적으로 만들거나 표현하는 일, 또는 그 작품을 말한다. Ⓑ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 누나 오늘은 하얀 옷 입고 밖에는 나가지마. 하늘이 너무 파래. 지나가던 새가 꼭 찍으면, 누나가 입고 간 하얀 옷에 파란 하늘 물 얼룩이 들라. 1) 창작 하려면 (1) 치열한 정신활동 시인이나 소설가는 창작에 필요한 남다른 기교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문학 작품을 다만 창작 기술의 소산으로 보면 곤란하다. 단적으로 말하면, 창작은 기교에 앞서 작가 정신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이란 인간탐구의 결과물이고 나아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한 형태로써 세계를 해석하는 인식틀(conceptional framework)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느 예술보다도 가치 지향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작에는 기교를 익히는 일보다 치열한 정신 활동을 몸에 익히는 일이 더 우선이다. (2) 인상적인 관찰 다음으로 인상적인 관찰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본 사물이나 현상에서 지배적 인상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온 사물이나 현상을 우리의 세계관이나 거름망을 통해 나름의 질서와 모양을 가진 구조물로 재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건성으로 보거나 대충 보아 넘기지 말고, 보통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까지 꼼꼼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꼼꼼하게 관찰하느라 다른 것과의 연관성 즉, 전체적인 구조를 놓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무등산 관찰 후 글짓기에서 산골짜기에 그득 쌓인 쓰레기 이야기만 늘어놓은 경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아들, 아버지, 어머니의 각각 다른 길 안내 방식) 또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은 아니다. 보인다는 것은 망막에 비쳐 스쳐지나가는 것이지만, 본다는 것은 의식이 동반된 정신활동으로 보이는 것 중에서 취사선택한다는 것이다. 그 때 무엇이 보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3) 풍부한 상상력 그 다음으로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 풍부한 상상력은 인간의 문화를 진보시켜온 원동력일 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활동의 원천이기도하다. 상상력이란 사물의 본질, 혹은 현상의 배후를 꿰뚫어 보는 정신의 힘이다. 경험과 생각과 감정이 인간 정신 속에 용해되어 조직화될 때 상상력이 생긴다. 그 힘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을 보게 하고,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나게 한다. 그런 이유로 상상력은 작가 정신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글쓰기는 상상력을 통해 현실 너머의 세계를 구현해 준다. 상상력의 빈곤은 작가 정신의 부재에서 생기거나 작가 정신의 부재를 초래할 뿐이다. 누구나 생각하고 느낀 것 말고 다른 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누가 그 작품을 읽으려 하겠는가? 상상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미루어 그리게 함으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글쓰기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틈을 메꾸고 그것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상상력이야말로 글을 쓸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미루어 그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기억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나 경험 없이 상상력이 따로 존재할 수 또한 없다.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사물이나 현상을 전제하지 않고 상상력을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 혹은 경험으로부터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상력은 그 경험의 범주에서 나오는 것이다. 경험을 발판으로 유추한 상상이 바로 문학적 상상력 즉 창조적인 생각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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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낱알을 고르다<마음을 여는 시> 낱알을 고르다 이은규 시인 가을이면 엄마는 챙이질을 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까불었다 낱말을 고르듯이 거두고 껍질을 날려보내고 치마처럼 저몄다 소금을 받아오게 하고 시집처럼 꽂아 놓았다 챙이같은 치마로 싸 안고 자식처럼 거두고 챙기고 키워 주었다 선택된 우리는 낱말이 되고 문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치마에 안겨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씨앗이 되어 엄마의 자식같은 시를 쓰고 연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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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 돌담길목포대 돌담길 김봉임 수필가 홍매화 나뭇가지 마디마디에 봉긋한 꽃망울들은 지난밤 단비가 너무 좋아 밤새도록 샤워를 했는지 영롱한 은구슬 굴리면서 아가씨 빨간 입술처럼 탱글탱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홍매화 옆으로는 연분홍 꽃망울과 백매화가 함께 어우러져 마치 봄의 여신들이 진 선 미를 자랑하듯 어깨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목포대 돌담길 사이사이로 심어놓은 꽃나무 묘목들이 지금은 빼곡하게 어우러져 타원형의 긴 돌담길을 풍성하게 장식하고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매년 봄이 되면 이 경관이 보고파서 긴긴 겨울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내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기다림의 미학이라 말할 수 있다. 자연은 한 권의 문학 교과서를 선물해 주는 듯해서 그 오묘함을 만끽하면 할수록 신비롭기만 하다.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갈색의 작은 벌들은 마치 시샘이라도 하는 양 내 앞을 가로막는다. 자고로 홍매화는 계절 따라 피었다가 지고, 무성했다가 시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매화만이 추위를 이겨내고 이른 봄 만물이 채 싹트기 전에 꽃망울을 찬란하게 터뜨리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매화는 입춘이 오기도 전에 충분히 태양의 기운을 빨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매화이기에 그 매력 또한 다른 꽃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제아무리 이쁜 꽃이라 한들 시들면 그만이다. 내가 서둘러 도화지와 물감을 꺼내 드는 이유다. 하얀 도화지에 매화 줄기를 그리고 그 마디마디에 꽃망울을 그려 보았다. 아마 옛날 선비들도 지는 꽃이 못내 아쉬워서 그림을 그리며 풍류를 즐겼으리라.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릴없이 홍매화에 빠져 상념에 젖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어둠으로 거무스레하다. 갑자기 상그리아 와인 잔에 밝은 불빛이 켜지듯 유리구슬들이 환하게 불이 붙는다. 어두워지자 트리 조명 구슬들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불이 켜진 것이다. 환하게 불을 밝혀 타원형의 거대한 꽃동산에 사슴 가족과 토끼 가족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올해가 토끼해라서 토끼 가족이 더욱 행복해 보인다. 마치 영화 속 장면이 내 눈앞에 있다. 장인의 손길로 다듬고 가꾸어진 트리 조명들을 보면서 감탄해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나서 자라고 꽃 피우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뭐랄까. 자연의 섭리 말이다. 지금 여기 청계에 사는 나는 아주 많이 복 받은 사람일 것이다. 나도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다. 이를테면 환경 미화라도 말이다. 나부터 쓰레기를 줄이고 물 한 방울이라도 아껴 쓸 일이다. 국가나 지자체가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 돈 쓰라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야 할 일이다. 한편 지난달 생활 공공요금 가스비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보다 두 배가 올라 있어 앞으로 삶의 무게가 버겁기까지 하다. 삶의 현실이 고유가 고물가 고금리로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당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쩌랴. 근검절약이 이 시대의 참 지혜려니 생각해본다. 그래서 문학은 삶을 달래고 삶은 문학을 그리는 이치를 나도 깨닫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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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서평> F자형 읽기<남악 서평> F자형 읽기 김현철(초당대 교수, 철학박사) 『언어를 디자인하라』 유용만 박용후 저 | 샘앤파커스 | 2022년 8월 31일 | 작년 이 지면을 통하여 앤드루 페트그리의 『루터, 브랜드가 되다』라는 책을 소개했었다. 저자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그것도 혁명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미디어의 변화는 단순히 정보 전달의 방식을 변화시킬 뿐만이 아니라, 동일한 정보의 내용 역시 어떤 미디어에 의해 전달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점도, 그리하여 지금부터 50년도 전에 맥루언(Marshall McLuhan)이 설파했던 “미디어가 메시지이다.”라는 경구를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는 시대임을 소개하였다. 광주광역시의 지하철은 이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앉을 자리를 제공할 정도로 여유있고 쾌적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 좋은 환경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습득하는 미디어가 ‘종이’에서 ‘모니터’로 변화되었음을, 그리고 요즘이 어떤 시대인지를 새삼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비단 지하철 풍경만이 아니다. 책이 필수적이라고 할 대학 강의실 풍경 역시 변화된 지 오래다. 수업시간에 이용할 강의자료는 파워포인트 등을 이용하여 화면에서 공유된다. 점점 종이책 교재는 이용되고 있지 않다. 교실에서 책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인가? 물론 여전히 칠판에 분필을 이용하여 글을 써야 하는 과목들이 있지만, 분필을 사용하는 풍경 역시 사라지는 것, 시간문제일 뿐이다. 위의 내용을 이번에 소개하는 책의 표현을 사용하여 정리해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자 미디어와 컴퓨터 등을 이용한 미디어,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 ‘종이책파’와 ‘전자책파’의 전쟁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이것이 ‘유튜브파’로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는 점점 사라지고 영상과 이미지를 통해 정보를 얻게 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 그것은 활자를 읽는 것이 귀찮고 힘든 작업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읽고 쓰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세태, 오늘 소개하는 책의 저자들이 지닌 문제의식이다. 그것의 생생한 예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메신저인 ‘카톡’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글을 주고받는다. 그것은 자신의 사소한 삶에 대한 나눔일 수도 있고, 이곳저곳에서 발췌된 좋은 내용의 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그들이 먼저 주목하는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글의 ‘길이’이다. 전달받은 글의 분량이 길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읽지 않는다. 긴 글은 소화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대가 이렇게 변하였기에 긴 글을 읽는 방식도 달라진다. 저자들은 이 세대 사람들이 긴 글을 소화해내는 두 가지 해결책을 소개한다. 첫째, 읽지 않는 것이다. 둘째, 속독이다. 영상 빨리 감기 혹은 불필요한 부분을 건너뛰며 영상을 시청하듯, 카톡을 통하여 긴 글이 ‘배달’되어 오면, 그 글을 읽는 독특한 방식, 빨리 읽기 방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낸 글읽기 방법, 저자들은 이 책에서 그것을 ‘F자형 읽기’로 규정한다. 맨 윗부분의 2-3문장을 읽은 후, 중간까지 뛰어넘고, 중반부의 1-2문장을 읽은 후 아래로 쭉 내려오는 읽기의 형상이 마치 알파벳 ‘F’를 닮았기에 저자들이 ‘F자형 읽기’로 칭한 것이다. 마치 어렸을 때 속독학원에서 배운 ‘대각선 읽기’처럼 말이다. 글을 읽지 않는 시대, 더군다나 긴 글은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시대에 저자들은 글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F자형 읽기’가 아닌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여 읽는 ‘느리게 읽기’이다. 이런 읽기는 어떤 방식으로 읽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은 글을 쓰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공감되는 문장, 내 생각과 배치되는 주장에 밑줄을 친 다음 책을 다 읽고 나서 그 문장을 모조리 순서대로 타이핑한다. 이어서 타이핑한 문장을 중심으로 책을 다 읽고 느낀 점을 추가하면서 독후감을 쓴다. 놀라운 사실은, 한 문장을 쓰면 연상작용이 일어나 다음 문장이 떠오른다. 그렇게 말이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쓴 다음 나중에 논리적 구조와 흐름을 조정하고 수정하면 된다.”(67쪽) “읽기는 결국 쓰기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 신문을 읽을 때에도 이 방법을 한번 적용해보면 어떨까? 김창진 박사의 <남악 칼럼>을 천천히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한번 시도해보자. 그리고 적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를지 기대해보자. 칼럼의 저자들과 소통이 되는 글쓰기를 한번 시도해보자. “남악신문의 진정한 읽기는 쓰기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