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 맑음속초22.2℃
  • 맑음26.7℃
  • 맑음철원24.7℃
  • 맑음동두천25.9℃
  • 맑음파주24.5℃
  • 맑음대관령23.8℃
  • 맑음춘천26.2℃
  • 구름많음백령도17.2℃
  • 맑음북강릉29.3℃
  • 맑음강릉31.6℃
  • 맑음동해25.5℃
  • 맑음서울26.5℃
  • 맑음인천23.2℃
  • 맑음원주26.0℃
  • 맑음울릉도24.1℃
  • 맑음수원25.6℃
  • 맑음영월27.4℃
  • 맑음충주27.1℃
  • 맑음서산23.4℃
  • 맑음울진30.8℃
  • 맑음청주27.5℃
  • 맑음대전27.0℃
  • 맑음추풍령27.0℃
  • 맑음안동27.2℃
  • 맑음상주28.4℃
  • 맑음포항29.3℃
  • 맑음군산23.8℃
  • 맑음대구29.2℃
  • 맑음전주27.5℃
  • 맑음울산27.4℃
  • 맑음창원27.5℃
  • 맑음광주27.8℃
  • 맑음부산24.0℃
  • 맑음통영24.5℃
  • 맑음목포24.5℃
  • 맑음여수23.2℃
  • 맑음흑산도23.9℃
  • 맑음완도26.6℃
  • 맑음고창
  • 맑음순천24.8℃
  • 맑음홍성(예)24.7℃
  • 맑음25.7℃
  • 맑음제주25.0℃
  • 맑음고산24.3℃
  • 맑음성산23.0℃
  • 구름조금서귀포23.0℃
  • 맑음진주26.2℃
  • 맑음강화22.6℃
  • 맑음양평25.5℃
  • 맑음이천26.7℃
  • 맑음인제26.3℃
  • 맑음홍천27.0℃
  • 맑음태백26.6℃
  • 맑음정선군27.9℃
  • 맑음제천25.6℃
  • 맑음보은26.3℃
  • 맑음천안26.2℃
  • 맑음보령23.6℃
  • 맑음부여26.4℃
  • 맑음금산27.7℃
  • 맑음26.1℃
  • 맑음부안25.1℃
  • 맑음임실27.5℃
  • 맑음정읍27.1℃
  • 맑음남원28.4℃
  • 맑음장수26.1℃
  • 맑음고창군28.1℃
  • 맑음영광군26.8℃
  • 맑음김해시27.3℃
  • 맑음순창군27.2℃
  • 맑음북창원28.1℃
  • 맑음양산시27.0℃
  • 맑음보성군25.4℃
  • 맑음강진군25.3℃
  • 맑음장흥24.7℃
  • 맑음해남25.2℃
  • 맑음고흥25.8℃
  • 맑음의령군28.6℃
  • 맑음함양군29.2℃
  • 맑음광양시26.5℃
  • 맑음진도군23.1℃
  • 맑음봉화25.8℃
  • 맑음영주26.7℃
  • 맑음문경27.7℃
  • 맑음청송군28.0℃
  • 맑음영덕28.6℃
  • 맑음의성27.5℃
  • 맑음구미27.4℃
  • 맑음영천28.1℃
  • 맑음경주시30.3℃
  • 맑음거창28.0℃
  • 맑음합천29.3℃
  • 맑음밀양29.5℃
  • 맑음산청27.6℃
  • 맑음거제24.4℃
  • 맑음남해25.5℃
  • 맑음25.8℃
2023 시·군역사문화발굴 학술세미나 : 영광군민의 임진왜란 시기 역사문화 발굴과 인물 조명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 특집

2023 시·군역사문화발굴 학술세미나 : 영광군민의 임진왜란 시기 역사문화 발굴과 인물 조명

2023 시·군역사문화발굴 학술세미나

주제 <영광군민의 임진왜란 시기 역사문화 발굴과 인물 조명>으로

12월 21일 영광문화예술의전당에서 개최, 열띤 토론 이어져

 

"2023 시·군역사문화발굴 사업” 일환으로 영광문화원(김범무 원장)이 주관하고 전라남도와 영광군 영광군의회가 주최한 학술세미나가 21일 오후 2시에 개최되었다.

이번 주제는 <영광군민의 임진왜란시기 역사문화 발굴과 인물조명>이었다.

폭설이 나리는 가운데도 의병장후손을 비롯하여 150여명의 군민들이 모여 학술세미나를 성료하였다.

영광군의 잊혀가는 노래를 청년음악회에서 열창하면서 식전행사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1부 사회를 맡은 영광문화원 한현선 사무국장 김구선생의 시를 전통 가곡으로 화답을 하였다. 이어서 본행사로 이어지고 영광문화원 김법무 원장은 영광군의 2023 역사문화발굴 사업은 "임진왜란에 활동하신 영광군 선열들의 활동을 조명하는 일로 매우 뜻 깊은 행사이다.”라고 하였다.

2부 행사는 전남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오승주 연구원이 진행하였다.

5개의 논문발표가 진행되었다.

1주제 발표자인 전남대학교 정현창박사는 임란 기간 영광군민들은 읍성을 자체적으로 지켜 향촌 방위 활동을 수행하였음을 역설하였다.

2주제 발표자인 호남의병연구소 노기욱 소장은 영광군민들이 군량을 모아 각처의 의병 군영으로 보내 의병활동을 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주었음을 밝혔다. 특히, 법성포항은 모곡한 쌀을 의주행재소에 조달한 거점으로 임금과 신하들의 군량 공급처였음을 추적하였다. 진주성전투가 발발하자 근왕의병에 나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을 격살하고 분전하여 호남지역을 온전하게 보존하였음 주장하였다.

3주제 발표자인 전라남도이순신연구소 노기욱 소장은 영광군민들 중 임진왜란 관련하여 참전한 인물 154명을 발굴하였다. 척왜를 외치며 남원성전투에서 전사한 영광사람들을 조명하였다.

4제 발표자인 전남대학교 김경태 교수는 정유재란 기간 일본군에 포로가 된 수은 강항 선생이 일본에 유학을 전파한 시조임을 강조하였다.

5주제 발표자인 광주보건대학교 황병성 명예교수는 영광군민들은 타지에 까지 군량을 전달 정도로 헌신적인 구국활동이 두드러진 곳이라고 하였다.

3부 토론은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김우철 교수가 좌장을 맡았다.

종합토론자로 조미선, 박일훈, 위주영, 김진수, 김병인 등이 나섰다.

군민들의 뜨거운 성원과 함께 의병 후손 한분 한분 모두가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시간이었다.

qq.jpg

2023 시·군역사문화발굴 학술세미나 발표자 및 토론자

 

[학술세미나 ‘암진왜란기 영광의 의병 활동’ 중 일부 발췌]

영광군민의 임란 근왕의병(勤王義兵)과 진주성전투

노기욱.jpg

호남의병연구소 소장 노기욱 박사

 

1. 영광군민의 읍성수성

임란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상현(宋象賢) 막하에서 활동하던 영광인 김사모(金嗣牟)의 전사 소식이 전해졌다. 향중에서는 이름난 인물이기에 조야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영광군수 남궁견(南宮涀)이 모친상을 당하여 본가로 귀향길을 서둘렀다.

111.png

오성수성제현실록(임진수성록을 재간한 내용이 수록됨)

 

남궁견은 세의(世誼)가 깊은 정희맹(丁希孟)을 개유장(開誘將)으로 임명하여 영광 읍치를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임진 8월 9일, 영광 의사 김몽해(金夢海), 정대수(丁大水) 등이 의병장 최경회의 군문으로 의병[1]이 되어 부전(赴戰)의 길을 떠났다.

이에 8월 27일 개유장 정희맹은 서둘러서 향중의 인사들을 향교로 모았다. 이 자리에 이응종(李應鍾), 이극양(李克揚, 이응종의 자), 이극부(李克扶, 이응종의 자), 김춘수(金春壽), 김남수(金楠壽, 김춘수의 아우), 강항(姜沆), 이희익(李希益, 이희용의 아우), 정여덕(鄭汝德), 정희맹(丁希孟, 정희열의 종형), 유익겸(柳益謙), 유영해(柳永海, 유익겸의 조카), 봉단의(奉端懿) 등이 참여하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 주제는 당장 시급한 읍성수성 방안이었다.

그리고 10월 18일에는 군민 열사 1백여 명이 오성관(筽城館)에서 수성동맹을 결성하였다. 영광의 선비들은 이응종(李應鍾)을 도별장(都別將)으로 추대한 후 24개의 부서를 편성하고 59개 직책으로 임무를 분할하였다. 임수춘(林秀春), 이굉중(李宏中), 이극부(李克扶), 정희열(丁希說) 등 4인은 겸직하였다.[2] 이에 55명의 수성군 지휘부가 결성되었다. 임진 수성에는 영광의 26개 성씨 집안이 동참하였으며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영광읍성 수성의 목표는 읍성을 지키지 못하면 전투 현장에서 식량 고갈을 겪게 됨으로 반드시 성을 지켜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 회의에서 도별장(都別將)에 이응종(李應鍾), 부장에 강태(姜泰), 종사관에 이홍종(李洪鍾)·이곤(李琨, 李長榮의 자)·신장길(辛長吉)·이용중(李容中)이 소임을 맡았다.

종사관 겸 폐막관에 임수춘(林秀春), 종사관 겸 참모관에는 정희열(丁希說, 정희맹의 종제), 군정에 이굉중(李宏中),·정희맹(丁希孟) 등이다. 참모관에는 이헌(李憲)·이안현(李安鉉)·이옥(李玉, 이만영의 자)·노석령(盧石齡)·유익겸(柳益謙)·김재택(金載澤)·봉단의(奉端懿)·임수춘(林秀春)등이 지정되었다.

장문서에는 김태복(金泰福)·이분(李芬)·이극부(李克扶)·강항(姜沆) 등이 선임되었다.

폐막관에는 이굉중(李宏中), 장문서 겸 폐막관에 이극부(李克扶)로 정하였다.

수성장에는 오귀영(吳貴英), 종사관 김남수(金楠壽)·정여기(丁汝璣), 도청서기에는 김구용(金九容)·정응벽(丁應璧)·오윤(吳玧)·정구(丁久) 등이 임명되었다.

대장군관에 정경(丁鏡, 정희맹의 자), 유영해(柳永海), 이효안(李孝顔, 이희용의 자), 이극양(李克揚)·이극수(李克授, 이응종의 조카) 등으로 하였다.

부장군관은 김운(金雲)·유집(柳潗, 유익겸의 자)·강윤(姜潤)이며, 남수문장에 이희익(李希益)·강극효(姜克孝), 북수문장에 김대성(金大成)·이거(李琚), 중위장에 최희윤(崔希尹), 중부장 이희룡(李希龍), 유군장에 김찬원(金贊元), 서외진장에 이효민(李孝閔, 이희용의 자), 남외진장에 김춘수(金春壽), 동외진장에 한여경(韓汝璟) 등이 주요군사업무를 배정 받았다.

종사관에 김경(金慶)·김수해(金秀海), 남종사관에 이유인(李惟認), 동종사관에 김광선(金光選), 군관에 김정식(金廷式)·송약선(宋若先)·정여덕(鄭汝德)·정념(鄭恬), 수성군관에 강락(姜洛, 강극효의 자)·김봉천(金奉天) 등으로 결정하였다.

영광읍성 수성체제는 당시 영광군수가 부친상을 당해 자리를 비운 상태여서 전란을 대비할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군사 행정 업무에 관련하여서는 부장·종사관·군정·참모관·장문서·폐막관·도청서기 등이 맡았다. 그리고 군사 전투 활동은 군관·수문장·유군장·중위장·중부장 등이 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10월 18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약 5개월간 수성활동을 전개하였다.[3] 1593년(선조 26) 2월 군수 남궁견이 복직되고 일본군과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임무를 끝내게 된다.

영광읍성 수성장 이응종은 "본군은 강회(江淮)의 보장처이자 호남 연해의 요충처로써 군량을 운반하여 먹이는 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나오는 때문에 만약 혹이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곡식의 운반로가 끊기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응종의 인식이 영광은 당(唐)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장순(張巡)·허원(許遠) 등과 수양성을 사수하여 적의 남하(南下)를 막은 것과 같은 전략적 중요한 요충지로 보았던 것이다.

이후 영광읍성 수성의 사실을 담은 임진수성록이 발행되기에 이르렀다.

(중략)

 

2.진주성전투

(중략)

진주성전투는 매우 열세의 상황이었다. 1593년(선조26) 6월 22일부터 일본군은 9만 명이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진주성은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사가 되어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은 6,000명과 의병 2,800명 그리고 민간인 24,000명 정도가 성안에 있었다. 6월 28일 순성장 황진이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6월 29일 장마로 진주성 성벽이 무너지고 성이 함락되었다. 김천일 최경회 진주성 수성군과 주민 6만여 명이 순절하였다.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 역시 피해가 커서 전력이 크게 꺾여 경상도로 철수하고 피아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진주성전투는 임란의 실질적 마지막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을 침공을 차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진주성 구원에 나선 영광군민은 김천일(金千鎰) 막하에 서응두(徐應斗), 이용중(李容中), 최철륜(崔鐵崙), 최희급(崔希伋), 유한량(劉漢良), 김청호(金清浩) 등이 전공을 세웠다. 최경회(崔慶會) 막하에서 김대성(金大成), 이용중(李容中), 정경(丁鏡), 정여덕(鄭汝德, 계사), 정대수(丁大壽, 계사), 김몽해(金夢海, 계사) 등이 함께 전공을 세웠다. 심우신(沈友信, 영광출신) 막하에서 임두춘(林逗春), 김보원(金輔元) 등이 이름을 날렸다. 장윤(張潤) 진막에서도 유한량(柳漢良)이 나섰다.

이들 대부분은 주장을 따라 순절하였다.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영광군민은 김좌방(金座芳), 김희주(金禧周), 최희급(崔希伋), 최희민(崔希閔, 희급의 아우), 최선(崔繕, 희급의 아들), 최련(崔練, 희급의 아들), 최번(崔繙, 희급의 아들), 이잠(李潛), 김청길(金清洁) 서응두(徐應斗), 심우신(沈友信), 임두춘(林逗春), 김보원(金輔元), 정여덕(鄭汝德), 정대수(丁大壽), 김몽해(金夢海), 김응방(金應芳) 등이다.

임란의 참혹한 전투에 일본군 척살을 외치며 나선 영광군민의 희생은 말 할 수 없이 켰다. 전쟁이 끝난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상훈을 포상하였다.

[1] 본고에서 영광 임진의병 정의는 임란기간 중 영광지역이나 영광군민이 일본군에 항절한 군민활동을 말한다.

[2] 壬辰守城錄

[3] 善養亭集(日記)

q.jpg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