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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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투고> 모두의 오월해마다 오월이 되면 국립5·18민주묘지로 향하는 길가엔 이팝나무 가지마다 하얀 꽃이 만발하여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하얀 꽃이 무성하게 핀 모습은 마치 쌀밥처럼 보이기도 하며, 1980년 5월 대학생과 시민들, 이웃들이 서로 주먹밥을 나누어 먹으며 신군부에 맞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뜨거웠던 날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이어진 유신독재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로 종말을 고한 뒤, 오랜 기간 독재와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가졌고, 그 열망은 이른바 ‘민주화의 봄’으로 피어난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갈망하던 국민들의 염원을 무시하고, 오히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집회와 시위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의 조치를 강행하였고,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하였다. 이에 맞서 광주의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해 ‘비상계엄 해제’등을 외치며 도심으로 진출했고,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자진하여 시민군에 주먹밥 등 음식, 생수, 생필품 등을 제공하며, 다함께 계엄군에 맞서 피 어린 애절한 호소와 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5월 27일 새벽부터 계엄군은 광주시와 전남지역의 통신을 모두 차단하고 전남도청을 완전히 포위한 뒤 총탄을 퍼부어 점령함으로써 열흘간에 걸친 광주 민중의 투쟁은 막을 내렸다. 5·18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으며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 국민 모두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오월 정신은 국민 모두가 ‘당연히’ 계승해야 하는 정신이자, 우리 모두의 자산이다. 이러한 오월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기 위해 매년 5월이 되면 5·18을 기억하기 위한 5·18민주화운동 중앙기념식을 비롯하여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우리 지청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의 의의와 가치를 국민과 함께 되새기고 오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모두의 오월, 민주를 그리다!’를 주제로 한 5·18민주문화제를 5월 한 달동안 개최한다. 지난 5월 7일, 목포정명여자중학교 학생 50여 명과 함께한 "목포 오월길 걷기”행사를 시작으로 총 3차례에 걸쳐 3개 중학교 417명의 학생과 함께하는 "민주역사 골든벨”, 5월 22일 14시 국립목포해양대학교에서 5·18연구소 전임교수인 김희송 교수(전남대학교5·18연구소)와 서부원 교사(살레시오 고등학교) 등이 패널로 참여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함께 소통하는 "5·18토크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제44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을 바치고 희생해 찾은 숭고한 민주주의를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왜 우리 ‘모두의 오월’로 기억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전남서부보훈지청 김민식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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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이여기> 로봇 드림어제 저녁 KBS 9시 뉴스를 시청하는데, ‘미국에서 화염을 내뿜는 로봇 개가 일반인들에게 판매되기 시작했다.’라는 앵커의 멘트가 나왔다. 이어서 ‘업체 측은 잡초를 없애고 눈을 녹이는 데 유용하다고 설명하지만, 총기처럼 규제를 받는 것도 아니어서 무기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라는 멘트가 이어졌다. 뉴스를 듣고 로봇의 순기능에 대한 기대와 반가움보다는 역기능에 대한 우려와 걱정의 마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인간을 닮은 금속인형이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진흙인형이 그 명령에 따른다’ 라는 내용이 로봇이라는 발상을 하게 한 원형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화와 전설에서의 이야기가 SF영화에서 로봇이라는 존재로 등장해 점점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다. 로봇(robot)이란 용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설가 차페크(Karel Capek)가 1921년 발간한 『R.U.R(Rossum's Universal Robots)』이라는 희곡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단다. 로봇의 어원이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로보타(robota)’인 만큼, 로봇의 역할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 수행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 로봇은 공상의 단계를 넘어 현실로 다가왔다. 최초의 산업용 로봇은 1961년 미국의 엥겔버거(Joseph Engelberger)가 개발한 ‘유니메이트(Unimate)’라는 로봇이다. 이 로봇은 포드자동차에서 금형주조 기계의 주물부품을 하역하는 데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가와사키중공업은 1968년에 미국의 로봇기술을 도입하여 산업용 로봇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매개로 일본은 로봇을 활용한 공장자동화를 통해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로봇은 용도에 따라 산업 현장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제품의 조립·검사 등을 담당하는 산업용 로봇, 청소·환자보조·장난감·교육실습 등과 같이 인간 생활에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용 로봇, 우주·심해·원자로 등에서 극한 작업을 수행하거나 전투에 활용하는 특수목적용 로봇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산업용 로봇이 개발되기 시작한 이래 1990년대에는 생산공정 자동화 및 부품소재 국산화를 매개로 자동차산업, 가전산업, 반도체산업, 조선산업 등에서 산업용 로봇이 널리 활용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지능형 로봇을 중심으로 로봇산업 자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2004년에는 차세대 성장동력사업 10대 분야의 하나로 지능형 로봇이 선정되어 로봇산업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새로운 산업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2008년에는 지능형 로봇산업의 지속적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지능형 로봇 개발 및 보급 촉진법」이 제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로봇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킨 것은 휴보(Hubo)라고 할 수 있다. 휴보는 일본의 아시모와 유사한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2004년에 한국과학기술원 연구팀이 개발한 바 있다. 2008년에는 휴보의 성능을 향상시킨 휴보2의 몸체가 완성되었고, 2012년에는 두발 로봇으로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휴보의 등장은 우리나라에서 장난감 로봇과 교육용 로봇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휴보와 함께 로봇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로봇청소기였다.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로봇청소기는 2003년에 스웨덴의 일렉트로룩스가 제작한 ‘트리로바이트’이다. 이후 삼성전자, LG전자, 유진로봇, 마미로봇 등이 로봇청소기 사업에 진출하였고, 2007년 이후에 로봇청소기 시장은 빠른 증가세를 보였다. 최근의 신제품은 외출시 버튼 하나만 누르면 구석구석 자동으로 청소해주며 물걸레질도 할 수 있는 기능까지 추가되어 주부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유명한 SF 작가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50년에 발간한 『아이 로봇(I Robot)』에서 로봇의 행동을 규제하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둘째,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셋째, 첫째와 둘째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일취월장하는 로봇기술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과연 70여년 전 아시모프가 제시한 로봇의 행동규제 원칙이 지켜질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필자만의 염려가 아닐 것이다. 지난 4월10일 제22대 국회의원 300명이 선출되었다. 진부한 당리당략의 정치를 벗어나 국회와 정부는 지능형 로봇을 비롯한 첨단 먹거리 산업에 대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보완하는 데에도 속도감 있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길 기대해 본다. 아울러 3월부터 반려 로봇과의 얘기를 다룬 《로봇 드림》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데 여야의원 오순도순 손잡고 한번 구경가보길 권해본다. 金在珥(동신대학교 명예교수,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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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투고> 4.19 혁명을 기억하며지난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총 선거가 있었다. 선거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슈가 있었는데 후보의 당선만큼 중요하게 다뤄진 부분이 공정한 선거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뉴스에서는 사전투표함 봉인지 훼손, 투표소를 감시하는 불법 카메라가 발견되었다는 내용 등이 보도되었고 국민들은 그러한 보도에 반응하며 공정한 선거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되는 지를 바라보는 의심이 너무 지나쳐서는 안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공정한 선거에 대한 열망과 부정선거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그것들이 바깥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마침 총선 이후 9일 뒤에 이러한 사회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들었던 최초의 사건이 64주년을 맞는다. 바로 4‧19혁명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첫 승리로 기록되어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준 역사적 사건의 시작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에서부터였다. 1960년 3월 15일 제 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선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부정선거가 이뤄졌다. 반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당시의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이승만의 사후에도 권력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러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얼마나 열심히 조작했는지 일부 지역에서는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득표율이 전체 유권자의 수를 넘긴 115%를 달성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선거 전부터 정치깡패 동원, 민주당 후보 유세 방해 등으로 자유당이 계획한 부정선거의 진상이 드러나고 있었고 2월 28일 고등학생들이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들고 일어난 대구 학생의거를 비롯하여 3월 15일 선거 당일 광주와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차 마산의거에서 사망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처참한 몰골로 발견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 도중 습격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항거의 불길은 중고등학생들에서 대학생으로 옮겨갔다. 4월 19일 서울의 대학생을 비롯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이승만 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으나, 전국적으로 번진 시위의 불길은 막을 수 없었고, 4월 25일 대학교수 300여명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거리 행진을 하기에 이르러, 결국 이승만은 사임 후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장면내각이 들어서면서 4.19 혁명은 막을 내린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잔인한 말이지만 실제로 역사가 걸어온 길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기본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이후 많은 민주주의 운동의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날 공정한 선거가 의심되는 보도 하나하나에 분노하고 그에 반응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선 영령들의 피와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가오는 4월 19일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불의에 항거한 영령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전남서부보훈지청 보훈과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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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달산 산책로> 봄날, 목포대 정류장에서화려한 4월 무안의 봄날… 요즘 계절은 애당초에도 추운 겨울은 없었다는 듯이 벚꽃 나무의 가지 사이로 따뜻한 미풍이 감돌며 완연한 봄날이다. 머리 위로 휘날리는 벚꽃들은 화창한 봄날의 선물인 양 한사코 이마의 애교머리를 흘러내리며 간지럼을 메긴다. 누가 말했던가, 봄은 젊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그런데 말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봄날이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화려한 봄맞이가 과연 몇 번이나 내게 허락되어 있는지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애달픔이 마음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주 금요일이 되면 목포 문학관에 시 창작 강의를 들으러 가기 위해 목포대 앞 플랫폼에서 목포로 가는 200번 버스를 기다린다. 오늘은 한발 늦어 전광판에는 앞으로 20분 후에 200번 버스가 도착할 예정이란다. 나는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고 포근한 봄날이라 아무 걱정도 없이 차분하게 다음 차를 기다리다 보니 옛날 생각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옛날에는 목포대 앞 버스 정류장이 목포 방면 이정표와 바람막이도 없는 지붕에 긴 의자만 달랑 놓여 있었다. 그 시절 무안 사람들은 이른 아침 첫차를 타야 목포 도깨비시장에 내다 팔 농산물과 유명한 복길리 낙지를 팔기 위해서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덜커덩거리는 만원 버스를 비집고 타야 했다. 월간 잡지나 수험서 등을 목포 시내 도매 책방에서 사다가 목포대 구내서점에 갖다 놓고 팔기도 했던 나는 가끔은 그 만원 버스를 이용하곤 했다. 지금은 버스 정류장이 이정표 대신에 버스 도착 시간을 수시로 알려주는 전광판이 근사하게 달려 있다. 앉는 자리에는 난방 시설도 갖추어져 있고 자동문 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으니 이쯤이면 아주 멋들어진 현대식 쉼터가 아닐 수 없다. 전광판은 내가 타야 할 버스가 2분 후면 도착한다고 알려주고 있으니 격세지감에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건너편 정류장은 삼학도에서 무안 종점으로 가는 200번 버스와 남악에서 무안 종점으로 가는 100번 버스, 그리고 무안 공항으로 가는 버스들이 정차한다. 맞은편 정류장으로 가벼운 옷차림의 멋진 대학생들이 줄줄이 내리면서 저마다 청운의 꿈을 그리며 대학 교문을 들어가는 뒷모습들이 가로등처럼 즐비하게 서 있는 벚꽃 가로수 터널의 봄날 맑은 햇빛에 반사되어 한 폭의 그림 같다. 예나 지금이나 발품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자가용 이용자들이 그다지 부럽지 않다. 예전 만원 버스와 달리 한산한 좌석버스에 앉아 넓게 보이는 창밖을 보면 아지랑이가 봄날 햇살에 부서지고, 산자락에는 진달래, 들 매화, 노란 개나리들이 한창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올라탄 버스는 외곽 노선을 미끄러지듯이 달려 나가고 머릿속에 시상은 저절로 떠오르고 그렇게 다듬어지는 시는 다시 그림으로 이어져 나도 모르게 콧노래로 응얼거리게 된다. 나는 정말이지 날로 발전해가는 이 지역에서 아름다운 문학을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때로는 농사일도 배우며 소소한 일상생활이 즐거워 무안에서 사는 것이 정녕 자랑스럽기만 하다. 다른 지역에 비하면 무안은 인구가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인구 10만 명의 도시가 되기 위해 무안군은 인구증대에 팔을 걷어 올리고 있고 전라남도에서도 많은 지원이 있다고 한다. 무안군이 앞으로 시로 승격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안의 교육, 전라남도의 교육,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교육의 일부를 담당하는 이곳 무안에 바로 목포대학교가 당당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정녕 나는 자긍심을 가진다. 어디 그뿐이랴. 무안읍내에 초당대가 있고 청계 상마리에 폴리텍대학도 있다. 그래서 내가 사는 이 지역은 교육의 도시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참으로 복 받은 지역이다. 그리고 양파의 고장 무안에는 산이 수려하고 바다에는 갯벌 낙지로 유명하다. 토지가 기름지고 다양한 농산물이 풍부해 사람들의 인심 또한 풍요로워 마치 따스한 봄날같이 훈훈하지 않은가. 김봉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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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이야기> 모바일 신분증이 지갑을 몰아내?모바일 신분증 시대가 열렸다. 운전면허증을 스마트폰에 저장해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지갑 없는 사회」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모바일 결제서비스가 자리를 잡으면서 현금과 실물카드의 활용도는 줄었지만 신분증만큼은 계속 지갑 속에 가지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모바일 신분증 시대로 진입한 이후로는 귀찮은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일상이 가능해졌다. 현대 사회에서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신분증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공공기관에서의 민원처리나 은행에서의 금융업무는 물론이고 편의점이나 무인 자판기에서의 성인확인, 온라인에서의 신원확인, 앱을 통한 킥보드나 렌터카 대여 등 다양한 상황에서 신분증이 필요하다. 뿐만아니라 지하철을 이용할 때나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나 목욕탕 등에서 경로할인을 받을 때에도 신분증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모든 곳에서 모바일 신분증이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운전면허증이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이른바 『모바일 신분증』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모바일 신분증은 스마트폰에 발급되는 디지털 신분증으로 현행 신분증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편의성과 보안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바일 운전면허증은 국가 모바일 신분증 시대를 처음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현대인은 신분증이나 지갑은 잊고 나와도 스마트폰은 좀처럼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쳇말로 껌딱지인 셈이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봄부터 모바일운전면허증과 모바일 국가보훈등록증을 발급하고 있다. 또한 내년 하반기부터는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계획이며 국가유공자증, 장애인등록증, 청소년증, 외국인등록증 등으로 모바일 신분증을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란다. 모바일 주민등록증은 모바일 공무원증, 모바일 운전면허증, 모바일 국가보훈등록증에 이은 4번째 모바일 신분증인 것이다. 이처럼 모바일 신분증은 신분증이 필요한 모든 곳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맞춰진 새로운 신원확인 방식이다. 앞으로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의 통합된 모바일 신분증의 사용으로 예전처럼 신분증을 소지하고 다니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바일 신분증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개인의 자기 정보 결정권을 강화하고 신원 정보의 보안과 신뢰성을 높여준다. 개인이 직접 정보를 관리하고 필요한 정보만 골라서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암호화된 데이터로 구성되어 있어 무단 접근을 방지하고 신원 정보의 위조나 조작의 예방이 가능하며,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모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한편 모바일 신분증은 분산 컴퓨팅 기술을 적용한 데이터 위변조 방지 기술인 블록체인(Blockchain) 기반의 DID(분산신원확인,Decentralized Identity)를 적용한다. 즉 개인 정보가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노드에 분산되어 저장되기때문에 신원정보 확인 시 여러 노드의 동의를 거쳐 검증되므로 신원 정보의 보안은 물론 신뢰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제나 송금 또한 훨씬 간편해진다. 예를 들어 해외송금 등 신분증 확인이 필요한 경우 지금까지는 실물카드를 꺼내 스마트폰으로 촬영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모바일 신분증 시대에는 이 같은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바일신분증은 우리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으며, 더욱 발전하여 향후 보다 많은 혜택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도 있다. 그동안 발생한 전산 장애로 인한 공무원증, 운전면허증, 국가보훈등록증 발급 중단과 행안부 주민등록발급시스템의 오류, 조달청 '나라장터' 접속 중단 사고 등과 같은 접속 장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관계부처는 노력하여 이용자들의 불안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정보시스템의 「해킹과 보안」은 「방패와 창」이라고 불리운다. 이 논쟁은 결론이나 해결없이 우리가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의 정보기기를 이용하는 한 영원히 공존할 것이다. 최근 정부에서는 의대 정원을 갑자기 2천명이나 늘리겠다고 한다. 공학도들이 이때다 싶어 의대 가려고 줄줄이 휴학을 하고 있다. 질병치료는 개인이 전쟁을 하고 있다면 정보시스템의 보안문제는 나라의 안위가 걸린 국가가 전쟁을 하게 되는 격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몽땅 의대로 진학하면 장차 우리나라의 미래를 걸머질 유능한 과학도는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실제로 수능 3등급도 의대 갈 수 있다고 홍보하면서 학원에서 의대 특별반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공대 가려던 고3 재학생들도 의대 가려고 들썩이고 있다. 행정가들의 단세포적인 정책 결정보다 의학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점진적인 의대정원 조정으로 작금의 이 혼란과 분열을 속히 수습해야 할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가장 간편하게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게 해주는 모바일 신분증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일상생활을 더욱 쾌적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지갑이여 안녕! 金在珥(동신대학교 명예교수,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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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년을 맞이하며봄바람이 불어오는 3월이면 생각나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고 있지만 3월 26일이 그의 순국일이라는 점은 아직은 생소하게 느끼는 듯하다. 3월 26일은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우리민족의 역적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중국 뤼순형무소에서 순국한 지 114년이 되는 뜻깊고도 가슴이 시린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순흥안씨 가문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부유한 유년기를 보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전 재산을 바쳐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한 패배를 맛보기도 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고,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6발의 총을 발사하여 그의 가슴과 옆구리와 복부에 명중시키고,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들을 만큼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그 후 당당히 체포에 응하였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일제의 한국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고, 침체되어 있던 항일 운동에 큰 울림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어 6차례 재판 끝에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3월 26일 수감된 지 114일 만에 31세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아직 채 꽃 피워보지도 못한 영웅을 우리는 떠나보내야 했다. 안중근 의사가 동포들에게 남긴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 말에는 독립을 향한 그의 열망, 조국을 향한 그의 애국심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의 유언은 1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민족의 영웅인 그가 가진 유일한 바람, 조국으로 돌아오고픈 소망이 유해가 묻힌 곳을 찾을 수 없어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오늘 부는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그의 유해가 조국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더불어 올해 순국 114주년을 맞아 대한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그의 고귀한 위국헌신의 정신을 우리 모두 본받아 개인의 안위를 넘어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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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이야기> 모바일 대기표金在珥(동신대학교 명예교수, 공학박사) 현대인들이 요즘 가장 자주 찾는 생활 속의 공공장소는 어디일까? 각자마다 다를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공원, 은행, 병원, 마트, 카페 등이 아닐까 한다. 이 중에서 공원은 언제든지 산책하고 싶으면 자유롭게 거닐면 되고, 마트와 카페 또한 개점 시간 내에서는 자유롭게 들러서 이용하면 된다. 그런데 은행과 병원은 대기표를 뽑거나 접수를 하고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은행은 운이 좋으면 십여분 이내에 업무를 볼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고 대기자가 많을 땐 1~2시간 이상도 걸렸다. 병원 역시 5분도 안되는 짧은 진료를 받기 위해 1시간 이상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더군다나 그들은 몸이 아픈 환자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직장인들은 반차를 내거나 아깝지만 그 소중한 휴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적어도 은행만큼은 지루하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른바 ‘모바일 대기표’ 서비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올해부터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은 물론이고 광주은행 등 지방은행까지 모바일 번호표 서비스를 속속 상용화하고 있다. 해당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몇 명이 대기하고 있으며 평균 대기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이 가능함으로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점심시간 등 한정된 시간에 업무를 처리하거나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특정 시간에 방문하는 경우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면 시간 낭비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편리한 ‘모바일 대기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민은행은 『KB스타뱅킹』, 신한은행은 『쏠뱅크』, 우리은행은 『won뱅크』, 하나은행은 『원큐(1Q)』, 농협은 『NH뱅킹』 과 같은 각 은행의 모바일 앱(Application 응용소프트웨어)을 스마트폰에 다운받아 이용하면 된다. 광주은행은 타행 서비스보다 접근성이 높은 점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타 은행처럼 모바일 앱을 다운받지 않고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접속해서 즉시 번호표를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에 지점방문을 통해 많이 이용했던 환전 서비스나, 대출서류 제출 업무 등도 이제 집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실물거래가 필요한 서비스인만큼 지점방문을 통해 많이 이용하던 업무인 '환전 서비스'는 아예 집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존에는 모바일 앱을 이용해 원하는 환율 시세에 맞춰 환전을 신청하는 것까지는 가능했었다. 반면에 병원은 어떠한가? 대형병원이야 응급실을 제외하곤 예약을 해야만 갈 수 있지만, 동네병원은 예약을 받아주지 않고 병원에 가서 접수한 순서대로 기다려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동네병원 환자는 감기 환자나 혈압·당뇨 등 만성질환자 등의 간단한 질환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주류일 것이다. 진료에 소요되는 시간이 5분도 채 안 걸리고 비슷비슷할 터인데 왜 예약이 안 되는 것일까? 대기하는 1시간여 시간 동안 육체적·정신적으로도 힘들기도 하지만 각종 전염성 질환에 노출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우선 간단한 ‘전화 예약제’를 시범 운영해보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모바일 대기표’ 서비스 도입 건은 소규모 개인병원 단독으로는 버겁다면 지자체별로 또는 의사협회 등의 단체 차원에서 점진적으로 논의해 나가면 어떨까 싶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긴장하게 되고 가뜩이나 움츠리게 된다. 게다가 의료진의 불친절과 고자세를 꾹 참고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더러 경험하게 된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헌법이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천명하고, 사람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릴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환자 또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바일 대기표’! 언뜻 보면 사소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고 시간만 절약할 수 있는 것처럼 간과될 수 있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면서 느낄 수 있는 지루함과 시간 낭비에서 오는 안타까움, 그리고 인간적 모멸감을 줄여줄 수 있는 ICT 기술이 있어 가능한 간단한 서비스이다. 이용할 방법을 몰라 자신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줄줄이 일을 보고 가는데도 마냥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는 어르신 등 디지털 약자를 위한 배려 창구도 강구해주는 아량도 담아서 운영해 준다면 더없이 훈훈한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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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달산 산책로> 희망의 봄<승달산 산책로> 희망의 봄 김봉임 수필가 갑진년 새해 입춘이 돌아왔다! 어쩐지 입춘 하면 생동감이 들어 만물이 세상에 쫑긋쫑긋 발돋움하려고 귀 기울여 단단히 발 디딤 할 준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니, 입춘은 신바람을 몰고 이내 삶의 나락에서 머물고 있다. 올해 104세 철학자로 지체 높으신 분의 새해의 희망은 ‘시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단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나도 제자들이나 시인들처럼 시를 쓰다 가고 싶다.”라는 기사를 접하고 나서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 큰 희망을 불어넣는 멋진 말이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에 비해 초라한 나지만 입춘이 되면 만물의 일원으로서 내게도 희망이 하나 있다. 늦은 나이지만 나 역시도 시인이 되어 초연히 시 낭송을 한 번 해보는 게 소망이다. 작년 봄부터 틈틈이 시 공부를 하면서 문학 독서를 하다 보니 세상사 삶이 시가 되고 시는 곧 삶의 행복을 장식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작년 겨울호 문예지 동산문학에 다섯 편의 시를 투고했더니 당선이 되었다며 당선 소감을 메일로 보내라는 문자가 핸드폰으로 왔다. 나는 기쁜 나머지 어린애마냥 방 한 바퀴 돌면서 마치 유명 시인이라도 되는 양 핸드폰을 부여잡고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해 보았다. 길을 걷다가도 길가에 함초롬이 피여 있는 들꽃을 보면서 온갖 역경을 딛고 영원한 사랑의 보랏빛을 띠며 활짝 핀 꽃을 보면 사랑스럽고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아직 머문 연초록의 작은 옹골진 꽃봉오리는 머리에 입력해놓고 집에 와서 도화지에 그려보며 시로 연작을 해본다. 시란 쓰고 싶다 해서 저절로 써지는 건 아니다. 사물의 아름다운 매력들이 머리에 그려져야 아름다운 시가 탄생 되는 거 같다. 그래서인지 시 쓰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 무작정 연습해서 잘 써질 일도 아니다. 유명한 시인들을 보면 부럽고 존경스럽기만 하다. 나는 입춘이 되면 소소한 일상생활의 할 일이 많아진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삶의 넉넉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즐겁고 글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 작년 가을에 수확한 메주콩으로 메주 네 덩이를 만들었는데 검고도 노랗게 아주 잘 띄워젔다. 마침 오늘이 길일이라고 해서 간장을 담가놓고 운동 삼아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앙상한 대추나무와 늘씬한 블루베리 나무들은 가지 마디마디에 ‘움’이 맺혀있어 밭에 심어놓은 해묵은 과일나무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몹시 추웠는데 오늘은 날씨가 눅눅하고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져서 지난날의 ‘삼한사온’이 근래에 와서는 ‘삼한사미’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5일장에 들러 어린 감나무 묘목을 세 그루 사 들고 밭 진입로에 와보니 맥없이 쓰러진 잡풀들이 뒤엉켜 산새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겨울에 언 땅이 풀려 질퍽하기 때문에 하우스 안에 넣어둔 장화로 바꿔 신고 나무 심을 곳을 정해보았다. 밭모퉁이의 작은 방죽에는 아직도 살얼음이 은쟁반처럼 떠 있다. 방죽 옆에 심어놓은 밤나무는 어느새 집채만큼이나 훌쩍 커버려 작년 가을에는 소쿠리에 한아름의 알밤을 그냥 안겨 주었었다. 나는 밤나무에게 고맙다며 가지치기를 해주면서 호박 넝쿨과 이름도 모르는 질긴 넝쿨이 나뭇가지를 휘감고 있어서 일일이 줄기를 도막내어 거둬주었다. 한결 가뿐해진 밤나무는 나더러 돌아오는 올 가을에도 튼튼하게 자라서 토실토실한 밤을 그냥 안겨주겠다는 듯이 하늘거린다. 나는 일복을 타고난 모양이다. 하긴 일복도 복은 복이다. 나는 15년 전에 홍시감 12그루와 단감나무 5그루를 사다 심었는데 2년 후에 감이 나름대로 수학량을 안겨 주었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는 감나무마다 감이 열리지 않아 홍시감 열댓 개만 수확했다. 작년 여름 긴 장마에 불 볓 더위가 그 원인이라 한다. 그나마 군데군데 홍시 감나무 3그루가 죽어 버렸다. 일복이 많은 나는 죽은 3그루의 나무를 베어 뽑아내고 그 자리에 5일장에서 새로 사온 감나무를 심었다. 그 밖에도 사과나무 5그루, 복숭아나무 3그루도 같이 키운다. 한 두해는 제법 꽃도 피고 열매도 맺어주더니만, 작년에는 추수가 엉망이었다. 복숭아나무는 재작년 겨울 추위에 얼어죽은 듯 매말라 있고, 사과나무는 여름에 수분을 제대로 섭취 못하고 벌레들에 시달렸던지 한 개의 사과도 내주지 않았다. 목포 사는 세 살 터울 여동생은 날 볼 때마다 뭐 하러 힘들게 손실을 봐가며 나무를 심느냐고 핀잔을 준다. 그렇지만 움직이며 사는 동안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희망의 봄날을 맞아 희망의 과일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입가에 쓴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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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이야기> 한국의 라스베이거스–새만금?<IT 이야기> 한국의 라스베이거스–새만금? 金在珥(동신대학교 명예교수, 공학박사) 지난 1월 9일부터 12일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4』가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CES'는 매년 개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전제품 박람회이다. 『CES 2024』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를 비롯한 전시장은 전 세계 150여 개 나라에서 온 4천개 이상의 참가기업과 14만명 이상 참관자들의 열기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CES 주관기관인 미국 소비자가전협회(CTA) 설립 100년째를 맞아 열린 이번 『CES 2024』는 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선언 이후 첫 번째 오프라인 행사로 진행됐던 만큼 전 세계 언론과 산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번 행사는 지난 1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영역에 AI가 침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 열풍의 확장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박람회 주제는 모든 산업을 포괄한다는 의미의 ‘올 투게더 올 온(All Together All On)’으로 정해졌다. 오토모티브와 인프라, 헬스케어, 스마트홈 등 전 산업에서 드러나는 인공지능(AI)의 발전이 박람회의 최대 화두가 되었으며, 전년도를 뛰어넘는 헬스케어, 교통, 스마트홈, AI 등 각종 분야의 혁신 기술을 선보여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삼성·SK·현대차·LG 등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등 760여 업체가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산업부와 중소벤처기업부, 서울시, KOTRA가 참여하는 통합 한국관에도 지방자치단체, 유관기관, 대학교 등 총 32개 기관과 443개 기업이 참가하여 이번 박람회에서 국내 기업들의 AI 기반 신기술을 뽐냈다고 한다. 라스베이거스(Las Vegas)는 미국 남서부 네바다주에 있는 우리 한국인은 물론이고 세계의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이다. 유명한 만큼 ‘네바다 사막의 빛나는 보석’,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지’, ‘24시간 잠들지 않는 불야성의 도시’ 등 수식어도 많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밝히는 상징적인 네온 불빛의 대명사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과 카지노가 들어선 6㎞가 넘는 길이의 유명한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은 조명, 색상, 엔터테인먼트로 활력이 넘쳐난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꾼과 올빼미족만을 위한 안식처가 아니며 미식가들의 천국이어서 세계적인 유명 셰프가 만든 경이적인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즐거움과 럭셔리함 그리고 특별한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놀이터인 셈이다. 또한 유명한 협곡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자연의 경이감과 위대함을 느끼기에도 충분하다. 필자는 한창이던 중년에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했는데 일과를 끝낸 저녁 무렵 호기심에 카지노 구경할까 하고 호텔 방을 나왔다. 객실 규모가 4,000여 개의 초대형 호텔이라 돌아갈 때 헤매지 않으려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면서 카지노 게임장 근처까지 왔다. 그때 수다를 떨고 지나가는 말괄량이 아가씨 4~5명이 대뜸 "Are you free tonight?”(오늘 밤에 시간 있어요?)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대꾸도 하지 않고 얼른 숙소로 돌아가 버렸지만, 훗날 생각해보니 점잖게 타이르지 못하고 촌티를 낸 것 같아 내내 쑥스러웠다. 그런데 이 라스베이거스는 본래부터 화려한 도시가 아니었다. 미국 서부 네바다 주의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쓸모없는 땅이었던 것이다. 18세기 라스베이거스 계곡을 처음 발견한 스페인 사람들이 '푸른 초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초원'을 의미하는 ‘라스베이거스’라고 이름 지어졌다. 즉 이곳은 황량하고 광대한 사막으로 과거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네바다에서 금과 은 그리고 철이 발견되면서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1905년 남캘리포니아와 솔트레이크시티를 잇는 철도가 완성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산의 열풍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지역경제가 어려워지자 네바다주에서는 세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도박을 합법화하였고, 이와 함께 후버대통령이 후버댐 공사를 시작하면서 댐과 라스베이거스를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하여 풍부한 물이 공급 가능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카지노와 휴양시설이 건설되기 시작되었다. 이때까지 라스베이거스는 단순히 도박과 환락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였으나 이후 많은 투자와 이미지 개선을 통해 현재는 가족 단위의 관광과 건전한 엔터테인먼트, 레저, 컨벤션을 비롯한 비즈니스 타운으로서도 인정받는 도시가 되었다. 독자들께서는 지난 여름 전북 새만금에서 개최된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를 기억하실 것이다. 전 세계적인 청소년 야영 축제 활동으로 전 세계 150개 스카우트 회원국에서 수만 명의 청소년과 지도자들이 참가한 우리나라를 알릴 수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졸속 준비와 운영으로 행사가 파행되어 국가적 수치심을 안겨주고 말았다. 새만금은 라스베이거스보다 50여 제곱킬로미터 넓은 400여 제곱킬로미터의 토지와 호수로 되어있고, 방조제는 총 길이가 33.9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있다. 매립작업과 부지조성은 2020년 끝났으며 간척사업 후 산업단지, 신도시, 관광지 그리고 농업용지로 개발될 예정이었는데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그야말로 사막 아닌 사막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태계의 보존가치가 높은 그 중요한 갯벌을 왜 막았는지 물음표의 연속이다. 라스베이거스를 사막에서 오늘날 세계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듯이 이 작은 칼럼이 새만금을 세계적인 명소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정책추진의 트리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서 『CES 2050』은 IT강국 한국의 새만금에서 개최되기를 꿈꿔본다. 또한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관광객이 인근의 그랜드캐니언 같은 대자연을 찾듯, 새만금을 방문한 관광객이 ‘천사의 섬’ 같은 아름다운 자연의 보고 서남해안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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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나들목> 탱자꽃 필 무렵<삶의 나들목> 탱자꽃 필 무렵 윤창식 소설가 정옥네 탱자나무 울타리에 하얗게 탱자꽃이 필 무렵이면 호랑나비 유충이 파충류 등피처럼 꼼틀거리곤 했다. 호랑나비 애벌레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라도 하면 알 수 없는 냄새를 풍겨 창훈은 기분이 아뜩해지기도 하였다. 창훈은 한동네 끝자락으로 이사온 외갓집에 엄마 심부름이라도 갈라치면 하필 정옥네 집 앞을 지나가는 일이 꽤 부담스러웠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창훈은 시누대와 참나무 등걸로 엮어 만든 자기네 울타리와는 영 딴판으로 날캄하기 짝이 없는 정옥네 탱자가시가 가슴팍을 콕콕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창훈은 무슨 악연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듯한 탱자나무에 그토록 예쁘게 하얀 꽃잎이 맺힐 수 있을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정옥이었다. 정옥의 부모는 깡시골 사람 답지 않게 마음씀이나 말맵시가 살가웠고 정옥의 오빠와 언니도 순둥이로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정옥만은 달랐다. 정옥은 예쁘장한 얼굴과는 달리 곧잘 심술을 부렸고 톡톡 쏘는 듯한 말투에는 가시가 밖혀 있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다도해를 갓 넘어온 봄바람에 누런 보리밭이 일렁이고 뽕나무 가지마다 까맣게 오돌개(오디)가 영글어가던 때였다. 그날도 창훈은 외할머니가 쥐어준 삶은 감자를 우적이며 자기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창훈은 정옥네 집 앞 길로 가지 말고 보리밭 이랑너머로 돌아서 갈까도 생각했으나 전에 없던 용기를 내어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로 했다. 창훈은 별일 아니란 투로 무슨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정옥네 탱자 울타리 둘레길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정옥이가 하얀 탱자꽃을 머리에 꽂고 사립문 앞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창훈은 뜨끔했다. 며칠 전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옥은 창훈이가 자기네 보리밭 가에 서있는 뽕나무에서 오돌개를 따먹었다고 공연히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창훈은 가시내가 또 무슨 시비를 걸까 싶어 고개를 푹 숙이며 재빠른 걸음으로 사립문 앞을 지나치다 정옥이와 부딪힐 뻔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정옥은 창훈이 일부러 자기를 끌어안았다는 엉뚱한 소문을 내고 다니는 바람에 한동안 창훈은 몸둘 바를 몰랐다. 창훈은 정옥이와 맞딱뜨릴 때마다 왠지 모를 불편한 기운을 느끼며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53년이 흘렀다.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을 찾은 윤창훈은 감회에 젖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던가. 마냥 순하기만 하던 정옥이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 못 서는 바람에 얼마 되지도 않은 논밭을 몽땅 빼앗기고 정옥네가 야반도주하듯 어디론가 떠나던 날이 어제인 듯 떠올랐다. 어리디어린 창훈에겐 밑도끝도 없는 형극(荊棘)의 둘레길로만 느껴지던 탱자꽃 울타리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대체 정옥은 창훈에게 왜 그랬을까? G시로 다시 돌아온 창훈은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열어 페이스북에 탱자꽃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포스팅하려고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마음에 드는 하얀 탱자꽃을 다운받고 사진 출처를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블로그 '탱자꽃 필 무렵'(블로거 : 한정옥) 정옥은 시인이 되어 있었다. 창훈은 형언할 수 없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가슴이 따사로우면 차가운 눈발 속에서도 하얀 탱자꽃이 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