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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필기구의 혁신을 일으킨 볼펜<지평선> 필기구의 혁신을 일으킨 볼펜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면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필기기구는 볼펜이다. 문방구에 가면 여러 가지 색깔과 다양한 디자인의 볼펜을 볼 수 있다. 이 볼펜(Ball Point Pen)을 처음 만든 사람은 헝가리 출신 라슬로 비로(Ladislao Biro)라는 신문 기자이다. 그는 1938년 윤전기에 사용되는 잉크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펜촉 끝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깨닫고는, 화학자인 동생 게오르크 비로(Georg Biro)의 도움을 받아 금속제 볼 베어링을 끝에 붙여 오늘날의 볼펜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비로 형제는 1943년 볼펜에 관한 발명 특허를 취득한 뒤, 그들만의 공장을 만들어 볼펜을 생산하게 된다. 비로 형제의 볼펜은 1945년 당시 9.75달러의 고가였으며 잘 써지지 않는 다는 불평이 많았으나, 계속되는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볼펜다운 볼펜을 완성했으나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한 남작이 이들로부터 특허권을 사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가 바로 지금의 빅을 만든 마르셀 빅(Marcel Bich)이다. 그는 원래 만년필을 제작하려 하였으나, 볼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매료되어 볼펜 제조 회사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비로 형제의 특허권을 샀다. 마르셀 비슈는 여러 국가에서도 부르기 쉽게 그의 이름(Bich)에서 'h'를 떼어 브랜드 '빅(BIC)’을 탄생시켰다. 1950년 12월, 빅(BIC)은 수레바퀴의 원리를 이용하여 크리스털 볼펜을 개발했다. 잉크 충전 없이 알파벳을 10만 자 가까이 쓸 수 있는 크리스털 볼펜은 29센트의 저렴한 가격으로 하루에 1만 개 이상 팔려나가며 빅(BIC)은 유명하게 되었다. 그 후 1950년, 마르셀 빅은 지금도 생산되는 인기 볼펜인 크리스탈 볼펜을 직접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았고, 이로 인해 빅은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설립자 마르셀 빅의 정신을 이어받아, 기능성, 합리적인 가격, 보편성을 브랜드 철학으로 삼고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초당 57자루가 팔릴 만큼 볼펜의 대명사가 되었고, 남미 국가와 영국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빅 비로(BIC Biro)펜으로 인해 볼펜을 비로라고 부른다. 1954년 BIC이탈리아가 설립되고, 2년 후에는 BIC브라질, 그 다음 해에는 영국지사가 설립되었다. 빅(BIC)은 볼펜 제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1972년부터 볼펜 이외의 제품으로 사업을 확장해 일회용 라이터, 일회용 면도기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1981년에는 스포츠용품 사업에 뛰어들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자, 이젠 볼펜의 기본 구조를 살펴보자. 이름이 말해주듯이 볼펜 끝에는 작은 금속 볼이 들어가 있다. 그 볼이 붓과 같은 역할을 해서 잉크를 종이에 묻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아무리 값이 저렴한 볼펜이라도 펜 끝은 손으로는 깎기 힘든 마이크로 단위로 가공되어 있다. 이 볼이 있는 부분은 언뜻 보기엔 튼튼해 보이지만 실은 섬세해서 세게 누르거나 떨어뜨리면 파손되기 십상이다. 볼펜의 잉크나 구조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볼펜은 기술적으로 더 이상 발달할 게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지만, 지금도 다양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볼펜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한 예가 가압 볼펜이다. 일반적인 볼펜은 심을 위로 향해서 글씨를 썼을 때 잉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심이 위로 향하면 중력이 작용해 잉크는 볼이 있는 쪽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반대로 내려오려고 한다. 그러면 필기하는 도중, 공기를 흡수해버리게 되므로 잉크와 볼펜 사이에 공간이 생기면 글씨를 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잉크 심의 공기 압력을 높여 항상 잉크가 볼이 있는 쪽을 향해 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가압 볼펜’이다. 급히 벽에 대고 메모할 때 이 볼펜을 사용하면 심이 위로 향해 있어도 필기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1963년 ‘모나미 153’이 출시되었다. 모나미 창업주 송삼석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가 볼펜 업에 뛰어든 건 1962년으로, 그해 4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산업박람회에서 일본 거래처 직원이 갖고 있던 볼펜을 보고 "이거구나”라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해 말 일본회사 ‘오토 볼펜’에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렇게 유성잉크를 만들었고 1963년 5월 1일 드디어 국민 볼펜 ‘모나미 153’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숫자 뒤에 쓰여 있는 0.7은 글씨의 굵기가 0.7mm라는 뜻이다. 이 제품이 히트치자 1974년엔 사명을 모나미로 바꾸었다. ‘모나미’는 프랑스어 ‘Mon Ami(내 친구)’에서 따왔다. 흔히 포켓이나 필기구 통에 담고 다니는 볼펜은 인류에겐 가장 유용한 필기 기구이다. 이를 더 발전시키고 더 질 좋은 필기 기구로 발전시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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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나폴레옹이 왜 러시아를 침략했을까<지평선> 나폴레옹이 왜 러시아를 침략했을까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시민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지만 큰 혼란이 발생했고, 이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새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1796년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799년에는 무능한 총재 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 정부를 수립하여 제1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1804년 국민투표로 프랑스 황제가 된다. 군인 출신인 나폴레옹의 꿈은 유럽을 제패하는 것이다. 그는 "유럽에 하나의 법전, 하나의 통화, 하나의 도량형을 갖게 하는 법령이 있어야 한다. 유럽의 모든 민족을 모아 하나의 백성으로 만들고 파리를 유럽의 수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유럽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1806년에는 유명무실해진 신성 로마제국을 해체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자기에게 계속 저항하고 있는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이는 유럽대륙과 영국이 통상을 할 수 없도록 하는 통상 금지령이지만 이로 인한 피해를 본 나라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그중 대표적인 나라가 러시아였다. 당시 영국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피해서 자기들의 상품을 중립국의 배로 가장한 채 러시아 해안으로 들어가 상품을 팔기도 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1810년 무렵 러시아는 영국과의 무역 단절로 경제난에 허덕이게 된다. 이에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봉쇄령을 무시하고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화가 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1812년 6월 22일 선제공격에 나선다. 나폴레옹은 6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로이센으로부터 2만 명, 오스트리아로부터 6만 명을 지원받았다. 역사교사 서영민에 의하면 프랑스 연합군은 총 5개 군으로 나뉘어 러시아를 공격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고자 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영토는 너무나 넓어서 프랑스 연합군이 생각한 것처럼 쉽게 정복되지 않았다. 또 지형에 밝았던 러시아군과 달리 프랑스 연합군은 정보가 별로 없어 정찰(偵察) 분야에서도 밀렸다. 이 점을 간파한 러시아는 전쟁을 소모전으로 끌고 갔고, 프랑스 연합군의 말들은 사료가 없어 떼죽음을 당했다. 병사들은 부대를 이탈해 식량을 찾아 헤맸었다. J일보에 의하면, 갓 징집된 이들이 기나긴 행군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였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나폴레옹조차도 다리가 붓고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는 등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고 했다. 프랑스 연합군은 같은 해 9월 14일 어렵게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나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으며, 그곳에서 불타는 도시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화재는 모스크바 총독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도시를 내주느니 불태우겠다는 것이었다. 불은 나흘 동안 계속돼 도시의 4분의 3이 파괴됐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가 점령되면 알렉산드르 1세가 평화협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그곳에서 5 주를 기다렸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응답하지 않았다. 이는 연합군이 러시아의 매서운 겨울 날씨를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민석홍의 세계문화사에 의하면, 같은 해 10월 러시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프랑스 연합군은 후퇴를 결정한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철수하던 프랑스 연합군은 러시아군 중에 사나운 코사크족 기병부대에게 공격을 받게 되고, 11월 초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여름옷을 입고 간 프랑스 연합군 병사들은 모스크바에서 훔쳐온 모피와 외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했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매일 밤마다 수백 명이 얼어 죽었다. 영양 결핍으로 병에 걸리는 병사가 속출했고. 처음 공격 시에는 65만 여 명이었으나, 5만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12월의 어느 날 파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군사 지휘권을 휘하 장군에게 넘기고 파리로 향했다. 일선 병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했다. 이와 동시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등 프랑스의 동맹국들이 나폴레옹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결국 1814년 1월, 대(對)프랑스 동맹군이 프랑스로 침입해 파리를 함락시키고 그해 4월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엘바섬으로 유배 보내면서 러시아 원정은 끝을 맺게 된다. 대륙 봉쇄령을 지키지 않는 러시아를 응징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 이 원정의 원인이지만, 나폴레옹은 그의 정예부대 60만 명을 잃었다. 이는 세계적인 굴욕이며 자기의 모독이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미물인 파리 목숨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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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어버이의 다른 이름은 눈물이다<지평선> 어버이의 다른 이름은 눈물이다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오늘날의 ‘어버이날’ 유래는 미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14년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선포하면서 정식 기념일이 되었다. 그 뒤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따로 시행해 오다가 1994년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이 어버이날 제정 법률안에 서명하면서부터 매년 7월의 4째 주 일요일에 어버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해 17회까지 행한 뒤 1973년 3월 30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6615호)에서 ‘어버이날’로 개칭해 현재까지 시행하고 있다. ‘어버이 은혜’는 양주동 선생이 가사를 짓고, 이흥렬 님이 곡을 붙였는데 이 노래가 나오자마자 전국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가 떠오른다. ‘어버이은혜’ 가사의 1연은 다음과 같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낳으실 때의 괴로움을 다 잊으시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아버지 어머니, 하늘 아래 그 무엇이 어버이의 은혜보다 넓고 깊다 하겠는가. 자식들에 대한 어버이의 희생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뜻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런 노래 가사를 접할 땐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돈다. 여기에는 피력하지 않았지만 2·3연은 어버이의 자식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애창되는 노래 가운데 하나다. 세상엔 어버이의 따뜻한 사랑과 지극한 정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아픔도 있다.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버렸나요. 한도 많은 세상길에 눈물만 흘립니다. 동서남북 방방곡곡 구름은 흘러가도, 생일 없는 어린 넋은 어데 메가 고향이오 어머님 아버님 왜 말이 없습니까 모진 것이 목숨이라 그러나 살겠어요 그리워라 우리부모 어디메 계시온지 꿈에라도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비춰주오 이유야 어떻든 버려진 몸, 한 많은 세상길에 흘린 눈물,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온 인생, 생일과 고향도 모르는 애달픈 몸이라고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2연에선 ‘어머님 아버님 왜 말이 없습니까’라고 외쳐본다. 그러나 메아리만 들려올 뿐이다. ‘모진 것이 목숨이라 그러나 살겠어요’라고 허탈해 하면서도 험한 풍파 속에서도 모진 목숨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한 부분이다. 이 부분에 이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리워라 우리부모 어디메 계시온지 꿈에라도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비춰주오’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애타는 심정을 토로한다. 눈물이 막 쏟아진 부분이다. 오직했으면 꿈에라도 그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을까. 이 노래는 슬픔과 우울함이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버지, 아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한들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님 위의 글은 ‘불효자는 웁니다’란 제목의 노래 가사이다. 6·25동란 때 어머니와 헤어진 이산가족이거나 객지 생활의 고달픔을 못 이겨 어머니를 못 뵈고 사별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리운 어머니를 불러 본 것이다. 나는 이산가족이거나 어머니와 거리를 둔 객지에서 사는 신세는 아니었지만,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는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한 번 가신 어머니는 다시는 오실 수가 없으니 땅을 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울러 어머니를 자주 뵙지 못한 생전의 죄와 잘못을 엎드려 사죄하고 있다. 못난 이 자식의 금의환향을 바라면서 손발이 터지도록 일하시는 어머니의 눈물을 그리고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터지는 애환이 서린 노래다. 이 눈물 저 눈물이 엉기고 엉겨 피눈물을 보는 것 같다. 가신님의 눈물이나 살아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눈물은 다 같은 눈물이지만 차원이 다르다. 어머니의 눈물은 희생이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오면, 아니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순간적으로 전신에 소름이 쫙 돋고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은 순전히 어버이와 맺은 천륜의 가치에 대한 공감의 발로일까? 나이가 드니 남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기만 하여도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난 이 나이가 되어도 어머니 아버지 하면 쓸 이야기 거리가 없다. 어버이란 단어가 너무나 큰 산이어서 그럴까. 어버이의 다른 이름은 눈물이다. 어버이날에 다시 한 번 불러본다. 어머니! 아버지!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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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스페인 내전(1)<지평선> 스페인 내전(1)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스페인 내전(에스파냐 내전)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스페인의 내전이다. 1936년 2월에 실시되었던 총선 결과 스페인 사회노동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였다. 의회를 장악한 인민 전선은 토지 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지주·자본가·로마 가톨릭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들을 등에 업고,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가 스페인 군부를 지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써 스페인은 현 정부에 소속한 인민전선 즉 공화파(좌파)와 반란군인 프랑코파(우파)로 완전히 갈라섰다. 소련이 공화파를 지원했지만 거리상 한계가 있었다. 대신 전 세계의 좌파 지식인·공산주의자·자유주의자·무정부주의자 등이 의용군 ‘국제여단’을 결성해 공화파인 시민군과 연대해 싸웠다. 앙드레 말로·어니스트 헤밍웨이·파블로 네루다 등 세계적 지성과 문호들도 공화파를 지원하기위해 총을 들고 스페인 전선으로 향했다. 프랑코파는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포르투갈이 지원하였으며, 스페인의 가톨릭교회와 왕당파는 프랑코파를 지원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양상을 띠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이유로 스페인 정부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공화파 측에는 비행기를, 프랑코 측에는 가솔린을 팔았다. . 1937년 4월 독일 공군은 공화파를 지지하는 지역에 있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융단 폭격해 1,600여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순전히 신무기를 시험해 볼 요량으로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 게르니카를 초토화한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당시 공산당원으로서 공화파를 지원했던 피카소가 이 비보를 전해 듣고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작품이 〈게르니카〉다. 피카소는 파시스트들이 집권한 조국에 이 걸작이 반입되는 것을 거부했고, 민주화된 1981년에야 스페인에서 전시되었다. 이 당시를 그린 소설로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란 작품이 있다. 1937년 파시스트와 공화정부파로 갈라져 싸우던 스페인 내전에서 미국 청년 로버트 죠단은 정의와 자유를 위해 공화 정부파의 의용군에 투신하여 게릴라 활동에 종사하는 중 그의 새로운 임무는 적군의 진격로에 해당하는 산중의 대철교를 3일 후에 폭파시키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죠단과 스페인의 소녀 마리아 사이의 로멘스를 그린 소설이다. 조지오웰도 소설 『동물농장』을 썼다. 1938년 초 프랑코파 군대가 테루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상황은 프랑코파 측에 유리하게 되었다. 테루엘은 오랫동안 프랑코파가 강세를 보이던 곳이었다. 1938년 1월 공화군은 테루엘을 점령하였다. 이에 맞서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군의 지원을 받아 테루엘을 공격하였다. 2월 22일 피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 끝에 테루엘은 다시 프랑코파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3월 7일 프랑코 측은 아라곤 공격을 감행하였다. 4월 17일 프랑코파의 군대가 지중해 연안까지 진격함으로써 정부 진영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5월이 되자 정부는 강화 조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프랑코가 정부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고, 7월까지 계속된 공방의 결과 공화군은 자신들의 XYZ 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다. 공화국 정부는 에브로 전투가 진행 중이던 7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 온 세계를 향해 대대적인 지원 호소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이로써 길고 지루한 전쟁은 끝을 맺었다. 스페인 내전이 제2차 대전의 전초전이었다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제3차 대전의 전초전 양상처럼 보인다. 이 전쟁도 하루 속히 끝났으면 한다. 전쟁이란 누가 승자이고 패자이건 간에 죽음을 동반하는 무서운 인간의 야만적인 행위이다. 이런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단결된 힘과 튼튼한 안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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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조국애<지평선>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조국애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한말 ‘별기군 훈련대’는 1895년 제2차 갑오개혁 당시에 창설되었다. 그해 1월에 일본 공사 미우라가 고종에게 근위병을 설치할 것을 제안해 2월에 장병을 뽑았다. 규모는 1개 대대 수준이었고 교관은 일본군이 맡았다. 고종의 근위병으로 출발한 별기군 훈련대는 제1대대장 이두황·제2대대장 우범선·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전 군부 협판 이주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친일파들이다.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이들을 포섭하여, 명성 황후 시해에 동원하였다. 훈련대 동원 책임자인 우범선은 같은 해 10월 8일(음 8. 20)에 일본인 자객을 앞세우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웠다. 이 사건이 을미년(1895)에 일어났다하여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그 후 일본에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은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와 결혼하였고, 1898년 이 둘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난 이가 우장춘이다.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1853~1923)에게 암살되었기에 우장춘은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불우하게 보냈다. 그 뒤 우장춘은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에서 학교를 다녔고, 박영효의 도움으로 1916년 도쿄제국대학교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했다. 1919년 졸업과 함께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육종학(育種學)연구를 시작했다. 1922년부터 『유전학 잡지』에 〈종자에 의해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관하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 활동을 했다. 그는 1924년 가정교사를 하면서 알게 된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했으며, 1927년에는 그를 후원하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고 이름을 바꾸기는 하지만 성은 우씨 성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쓴 논문에는 이름의 영어 표기가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되어 있다고 한다. 또 그는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평생을 보냈다고 한 인터뷰에서 증언한 바가 있다. 아버지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컸던 것 같다. 1930년 나팔꽃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제출용 논문이 시험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4 년여의 노력 끝에 「종의 합성 이론」이라는 논문을 다시 작성·제출하여 1936년 도쿄제국대학교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5년 실험적으로 증명한 ‘종의 합성 이론’은 우장춘 박사의 가장 큰 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이었다. 기하라 히토시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종의 합성 이론’이란 무엇일까? 1936년 우장춘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배추 속(屬)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우장춘 박사는 종(種)은 달라도 같은 속의 식물을 교배하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식물을 교잡해 만든 새로운 식물을 ‘우장춘 트라이앵글’이라 부른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기사(技士)가 되지 못하고 계속 기수(技手)에 머무르게 되자 연구소를 퇴사했다. 1937년 다키이종묘회사(瀧井種苗會社) 연구농장장(硏究農場長)으로 초빙되어 1945년 사임할 때까지 의욕적인 연구는 물론 학술지 『원예와 육종』을 발행하는 등 육종의 과학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8·15해방 후 식민통치로 피폐해진 농촌을 구하고자 1947년부터 벌어진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운동’에 답하여 귀국을 결심하였고, 귀국 후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1953년에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칭)의 초대소장에 취임했다. 1951년 우장춘 박사는 제주도를 찾아, 제주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장마가 빨라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시가가 겹치니 좋은 종자를 생산하기 어렵다며, 대신에 감귤 재배를 권장하였다. 이후 우장춘의 권유로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감귤 생산지가 됐다. 또 우장춘 박사는 ‘종의 합성 이론’을 이용하여 맛 좋고 병에 강한 배추와 무 품종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됐던 강원도 감자의 품종을 개량해 세계적으로 맛 좋고 튼튼한 강원도 감자도 생산했다. 이 뿐만 아니라 벼의 육종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지병인 십이지장 궤양으로 벼 연구의 새로운 결실을 보지 못함을 안타가워 하면서 1959년 8월 11일 숨을 거두었다. 일본에 거주하면서도 성을 바꾸지 않고, 아버지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일생을 보낸 우장춘 박사. 우리는 그의 왕성한 연구 활동 덕분에 맛좋은 감귤, 바이러스에 강한 감자, 씨 없고 달콤하며 사각사각한 수박, 싱싱하고 병충해에 강한 배추와 무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우장춘 박사의 육종 과학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자 조국애의 발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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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박태보와 기사환국<지평선> 박태보와 기사환국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박태보(朴泰輔-1654~1689)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그의 아버지는 박세당이다. 박세당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 출신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아들 태보(泰輔)을 낳고 처가를 왕래하며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업을 계속하여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을 하고 성균관 전적이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여러 벼슬길을 거쳐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왔고, 1670년에는 잠시 통진 현감을 지냈다. 아들 태보(泰輔)도 조선 숙종 때인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했다. 이 집안은 부자(父子)가 대과에 장원한 사례이다. 이해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의 장인은 이후원이고 장모는 광산김씨 김반의 딸(김만기·김만중의 고모)이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의 모함을 받아 선천에 귀양 갔다가 복직되었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아 무사했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西人)들이 여러 차례 박태보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와 인척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박태보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켰기에 면직되었다. 박태보의 비극적 죽음을 가져온 사건의 발단은 숙종의 인현왕후에 대한 폐출 시도였다. 1688년 10월에 아이를 갖지 못한 인현왕후와 달리 후궁 소의(昭儀) 장 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어 이듬해인 1689년 1월에 숙종은 곧바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원자(元子)로 봉하고, 소의 장 씨를 희빈(禧嬪)으로 삼는 일을 강행하였다. 이어 숙종은 인현왕후의 투기를 비난하는 비망기(備忘記)를 조정에 내림으로서 일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다시 말하면 인현황후를 폐비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 오두인, 박태보 등 약 80여 명이 모여 상소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당초 상소를 위해 모여든 선비 중에는 상소문 초본을 넣고 온 이들이 있어, 전 응교 박태보가 여러 글을 모아 손수 첨삭하여 글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해서 전 판서 오두인을 상소 대표인 소두(疏頭)로 하여 승정원에 상소를 바쳤는데, 이때가 기사년(1689년) 4월 25일 오후 4시경이었다. 황혼녘에 승지를 불러들여 상소문을 읽자마자 숙종은 상소를 올린 이들을 즉시 잡아다 친국(親鞫)할 것을 명령한다. 상소문에는 옛 성왕들은 배필인 왕비를 중히 여겼음을 지적하고, 설령 왕비에게 과실이 있더라도 망극한 죄명을 씌워서 무서운 위엄을 떨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런 상소문의 내용이 숙종의 화를 돋운 것이다. 국문장에서 숙종이 폐비 반대 상소를 작성한 배경을 추궁하자 박태보는 당당하게 말했다. “군신, 부자는 일체이옵니다. 이제 어느 사람이 제 아비가 만일 지나친 노염을 내어 죄 없는 제 어미를 내쫓고자 하면 그 자식 된 자가 어찌 울면서 제 아비에게 간하지 않으오리까? 신들이 만 번 죽을 마음으로 한 장 상소를 올렸을 뿐이지 어찌 전하를 배반할 뜻이 있겠습니까?” 숙종이 노여움을 참지 못하여 더욱 중형을 가하지만, 그는 조금도 굴복하는 기색이 없이 간하며 죽여 달라고 한다. 박태보가 계속해서 말대답을 하자 크게 노한 숙종은 매를 몹시 때리라고 엄하게 분부하였다. 임금의 분노가 계속되고 호령이 더욱 엄하여 장치는 소리가 궁궐 너머 향교동에까지 들렸다. 이를 박태보전에는 골육이 다 깨지고 찢어져 유혈이 낭자한데도 박태보는 조금도 아프다는 소리를 내지 않자, 숙종이 부채로 안석(案席)을 치며, “이렇게 형장을 가했는데도 아프다는 소리가 없으니 이런 독한 물건이 무슨 일을 못하리오. 엄히 치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숙종은 끝내 중전을 내치고, 박태보를 진도로 유배 보낸다. 이에 만조백관이 박태보를 전송하고 원근친척이 서러워했다. 박태보는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사육신 묘역 부근에서 형독(刑毒)이 나서 죽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다. 이를 1689년 기사년에 일어난 환국이라 하여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이때 박태보의 나이는 36세였다. 한참 나이에 고혼이 되고 말았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매우 슬퍼했다. 현대 사람들이라고 박태보의 이 행신을 보고 웃겠는가? 그 후 숙종은 이때의 일을 후회하고 박태보를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다시 영의정으로 가증하고 문열(文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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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2021년 지구촌 단상<지평선> 2021년 지구촌 단상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2020년 내내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2021년 한 해도 계속 세계를 괴롭혔다. 2021년 초에는 미국·유럽의 바이러스 확산세가 특히 심각했으나, 백신 접종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상황이 서서히 호전되는가 싶더니만, 이해 봄에 인구 대국 인도에서 확인된 델타변이가 전 세계로 빠르게 번지면서 코로나 종식은 물거품이 되었다. 11월 말엔 델타 변이보다 전파력이 훨씬 강한 오미크론 변이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확인됐다. 오미크론은 공식 확인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많은 나라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세계는 여전히 코로나19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12월 27일 현재, 코로나19에 확진된 사람은 2억7600만 명, 사망자는 537만4천 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적인 코로나 19 창궐 속에서도, 조 바이든은 2021년 1월 20일 제 46대 미국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트럼프 시절 만들어진 중국 견제 성격의 미국·인도·오스트레일리아·일본 4개국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를 정상급으로 격상했으며, 9월 말 첫 대면 정상회의를 열었다. 또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의 새로운 3국 동맹체인 오커스(AUKUS)를 출범시키고 오스트레일리아의 핵추진 잠수함 획득을 지원하기로 했다. 아울러 중국의 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인 일대일로에 맞서, 개발도상국 인프라 건설을 지원하는 ‘더 나은 세계 재건’(B3W) 구상도 출범시켰다. 바이든은 12월 9~10일 중국, 러시아 등을 제외하고 세계 110여개국 정상을 초대해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열었다. 바이든 정부는 또 신장 위구르족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 탄압을 이유로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미국에 맞서고 있는 중국의 시진핑은 마오쩌둥·덩샤오핑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3세대 영도자’ 지위를 굳혔다. 2022년에 제3기 출범을 시작할 예정이다. 아울러 중국은 대만을 흡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대만은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패권 다툼의 한복판에 놓인 채 1년 내내 시달렸다. 한겨레에 의하면 미-중 신 냉전이 한층 가열되면서, 대만에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게 거론됐다. 중국은 올해 대만의 하늘을 최첨단 전투기로 940차례 이상 위협했고, 미국은 대만에 소규모이긴 하지만 군사 훈련단을 보냈다. 대만은 미국과의 협력을 염두에 둔 대규모 군사훈련인 ‘한광 훈련’을 실시했다. 그런가 하면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사라졌다. 지난해 6월 홍콩 국가보안법이 도입되며 예상했던 것보다 사정이 훨씬 심각했다. 베이징의 지시를 받은 홍콩 정부는 민주 진영 인사들의 말과 행동을 꼬투리 잡아 체포했고, 민주 단체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다. H일보에 의하며 민주 진영 대표 언론사인 <핑궈일보>가 지난 6월 스스로 폐간을 결정했고, 주요 시민단체는 해산했으며, 19일 치러진 선거로 입법회는 친중파로 채워졌다. 홍콩을 떠나겠다는 홍콩인은 40%가 넘는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이 8월31일 완전 철군했다. 2001년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를 품어준 당시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침공한 지 20년 만이었다. 아프간 전쟁은 미국의 최장기 전쟁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수많은 인명과 자금을 투입한 뒤 다시 ‘탈레반의 집권’이란 전쟁 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지도력에 큰 회의를 남겼다. 크라스노다르와 AP 연합뉴스에 의하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지대에 증강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11월 초에 확인되면서 새로운 전쟁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국경에 약 10만 병력과 장비를 배치한 러시아가 내년 초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고 하자 이를 막으려는 러시아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러시아는 새해 초 미국과 협상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지구의 온난화이다. 온난화를 막지 못하면 인류가 공멸할 것이라는 경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10월31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렸다. 아쉽게도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그러나 197개국 정부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일정을 늘려가며 11월13일까지 진행한 총회에서 석탄 사용을 단계적으로 줄이자는 합의가 도출됐다. 그러나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보다 1.5℃ 높은 수준에서 억제하는 데 필요한 과제는 다음 총회로 넘겨지게 됐다. 이 외에도 이란과 서방이 ‘이란 핵협정’을 복원하기 위한 협상을 12월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식적으로 재개했다. 이란은 즉각적 제재 해제를, 미국은 핵무기 개발과 연결될 수 있는 이란의 활동 중지를 요구하며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코로나 19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나날이 치솟는 물가로 세계가 인플레이션으로 짓눌러 있다. 미국 등은 금리 인상으로 돈줄 죄기에 나설 태세라고 한다. 그러나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경기부양의 필요성이 제기 된다면 각국 중앙은행의 고민은 더욱 깊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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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지구 온난화로 기후 재앙 시작<지평선> 지구 온난화로 기후 재앙 시작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대서양 해류의 변화를 분석한 피터 드 메노칼 우즈홀해양연구소(WHOI) 소장(미 컬럼비아대 교수)은 최근 뉴욕타임스(NYT)에 “지구 온난화로 빠르게 녹고 있는 북극 빙하가 대서양의 해류 순환 시스템을 바꾸고, 이로 인해 곳곳에 기후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해류가 순환하는 것은 남반구의 따뜻한 해류가 북쪽으로 올라가 차갑게 식은 뒤 바다 깊은 곳으로 하강하면서 얻는 동력 때문이다. 이 힘을 바탕으로 해류가 마치 컨베이어 벨트(물건을 연속적으로 이동·운반하는 장치)처럼 열을 실어 여러 대륙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컨베이어 벨트처럼 움직이는 거대한 해류에 이상 조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해양학자들은 분석한다. 그린란드 빙하가 녹아 담수가 되어 바다로 흘러들면서 수천 또는 수만 년 안정적으로 이어온 해류 순환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해류 순환 속도가 15% 줄었고, 최근엔 1000년 만에 가장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해류 순환이 느려지면 남쪽 바다의 열이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정체돼 유럽과 북아프리카 등은 가뭄이 심해지고, 대서양엔 허리케인이 증가하는 등 재앙에 가까운 기후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게 학자들의 우려다. 지구의 거대한 순환 시스템 작동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 대비 1.2도 올랐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그린란드 빙하는 2002년 이후 매년 2770억t, 남극 빙하는 1510억t씩 녹거나 떨어져 나와 바다로 흘러들어와 바닷가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는 큰 재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독일과 노르웨이 연구팀은 지난달 더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내놨다. 그린란드 빙하의 상당 부분이 ‘티핑 포인트(작은 요인만 더해져도 엄청난 변화가 생기게 되는 전환점)’ 직전에 놓여있으며, 수세기에 걸쳐 해수면을 1~2m까지 높일 양의 빙하가 녹아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빙하 꼭대기 표면이 녹기 시작해 빙하 높이가 일단 낮아지기만 하면 대기 온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녹는 속도가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는 폭염·가뭄·폭우 등 기후 재앙을 체감하고 있다. 미국·유럽 등은 매년 기록적인 폭염과 이로 인한 가뭄과 산불 등으로 인명 피해와 작물 생산량 감소, 산림·생태계 소실 등 피해가 극심하다. 올해 미 서부에선 6월 기준 사상 최고기온을 기록하는 지역이 속출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선 50도 넘는 폭염이 올해 평년보다 한 달 일찍 시작됐다. 작년 대서양에는 역대 가장 많은 30개 허리케인이 발생해 미국과 중앙아메리카를 휩쓸고 지나갔고, 중국과 인도에선 작년 수개월간 이어진 폭우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국제사회는 2100년까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1.5도로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18년 발표한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에서 1.5도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많은 지역에서 극한 고온 현상이 늘어나고, 일부 지역에서는 호우와 가뭄, 강수 부족이 나타나며, 곡물 수확량이 감소하고 생물 다양성 훼손도 예상되는 등 기후 위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봤다. 기온이 2도 상승할 경우 예측은 훨씬 파괴적이다. 해수면 높이가 0.3~0.93m 상승하고, 중위도 지역의 연중 최고 기온은 4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전 지구 육지 면적의 약 13%는 현재와는 다른 유형의 생태계로 바뀌게 되며, 식물의 16%, 척추동물의 8%, 곤충의 18%는 서식지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IPCC는 “상승 폭을 1.5도 이하로 억제해야 생태계, 식량, 보건 시스템 등에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다”고 했다.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온난화가 심해질수록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는 폭염이 자주 찾아오고, 호우·홍수는 더 강하게 더 자주 발생할 것으로 전망됐다. 변영화 기상과학원 기상연구관은 “동아시아에서 극한 고온은 증가하는 반면, 한파 관련 지수는 감소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연안 지역 해수면 상승과 해양 산성화 등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해수면이 높아지면 해안가의 도시나 갯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거나 상실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기상학자들이 늘 해오던 말이다. 하경자 부산대 대기환경과학과 교수는 “큰 대륙 연안에 있는 우리나라는 호우의 강도도 강해지고, 홍수 피해 지역도 넓어질 수밖에 없다. 비가 몰아서 오면 다른 때에는 가뭄이 일어나기도 쉽다”고 말했다. 온난화를 막을 방법은 있을까. 보고서에 따르면 탄소중립(넷제로, Net Zero)이 유일한 전제조건이다. 이산화탄소 누적 배출량을 제한하고 메탄 등 다른 온실가스 배출도 대폭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메탄 배출 감축이 이뤄질 경우 온난화를 억제하는 것뿐 아니라 대기 질도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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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중국의 공동부유(共同富裕) 시대<지평선> 중국의 공동부유(共同富裕) 시대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고대나 현대나 중국 인민들이 원하는 것은 난세를 피해 샤오캉과 다퉁으로 가는 것이다. 중국의 공자는 시대를 어지러운 난세(亂世)와 다소 안정된 샤오캉(小康), 유토피아에 가까운 다퉁(大同)으로 구분했다. 샤오캉은 먼저 자기 집안을 편안하게 하는 천하위가(天下爲家) 사회라 하고, 다퉁(대동사회)은 큰 도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로 천하위공(天下爲公) 사회라고도 한다. 1987년 제13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中國共產黨全國代表大會)에서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위의 이론을 토대로 중국의 경제발전 목표로 원바오(溫飽, 온포), 샤오캉, 다퉁의 3단계로 이뤄진 싼부쩌우(三步走, 세 걸음) 계획을 제시했다. 원바오는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다는 뜻으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단계를 말한다. 두 번째 단계인 샤오캉 시대는 국민의 생활수준을 중산층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회이며, 다퉁(大同) 시대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실현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중국은 10년 동안 의식주를 해결하고 나서, 1997년 9월 공산당 15대 회의에서 앞으로 100년 목표를 1단계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 사회, 2단계 대동(大同) 사회의 실현으로 수정 변경하였다. 대동 사회는 2017년 10월 공산당 19대 회의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수정됐다. 2002년 중국 정부는 중국이 샤오캉 사회에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2013년 취임한 시진핑 중국 주석은 첫 연설에서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해 일부가 아닌 전면적 샤오캉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샤오캉이 실현되려면 202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3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는 되어야 하고 이는 중산층 단계를 의미한다. 8년이 지난 2021년 7월 1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 주석은 샤오캉 사회를 실현했다고 밝혔다. 또, 공산당 창건 100주년인 2021년부터 신중국 성립 100주년인 2049년까지 다퉁 시대(사회주의 현대화 강국)를 실현한다는 목표이다. 이를 표로 나타내면 원바오 단계 → 샤오캉 단계 → 다퉁 단계(사회주의 현대화 강국)로 나타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에 의하면 이제 다퉁 단계인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시작이다. 지금까지는 성장을 중시했지만 앞으로는 분배를 보다 강조하는 쪽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가운데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가기 위한 시 주석의 ‘공동부유’ 강조는 자신의 장기 집권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라고 많은 중국인민들은 보고 있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약 40년간 분배보다 성장을 우선시하면서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지만 심각한 소득 불균형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중국의 상위 1% 부자가 전체 부의 31%를 갖고 있다는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14억 명 중국 인구 가운데 6억 명은 한 달 수입이 1000위안(약 18만 원)에 불과하다. 특정 계층에 부의 쏠림이 계속되면 소득 하위 계층에서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이는 공산주의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8월 17일 시 주석이 공동부유 실현을 위해 부유층과 기업이 차지하는 몫을 줄여야 한다는 방향도 제시했다. 다음 날 중국 최대 게임회사 텐센트는 9조 원을 기부하겠다고 했고, 알리바바는 약 18조 원을 들여 공동부유 10대 행동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사교육과 연예계를 향한 규제도 불평등 해소를 위한 조치로 보고 있다. 올해 들어 중국은 알리바바, 디디추싱 같은 빅테크를 시작으로 사교육, 게임, 연예계 등 돈이 몰리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과도한 규제가 중국 내 기업가 정신을 무디게 해 성장을 저해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기술 업계의 거물 여러 명이 그들의 회사와 공적인 업무에서 물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이 자국 빅테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은 사실상 무대에서 사라졌고 젊은 창업자들도 줄줄이 회사를 떠나고 있다. 전자상거래 기업 핀둬둬 창업자인 황정(41)은 최고경영자(CEO)직에 이어 이사회 의장직까지 내려놓으며 3월 은퇴했고, 바이트댄스 창업자 장이밍(38)과 징둥그룹 창업자 류창둥(48)도 CEO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공산당이 전략적으로 기업을 통제해 나가면서 성장과 분배를 함께 추구하는 강화된 국가 자본주의 모델을 보여줄 것이란 전망도 있다. 공산당은 규제 확대에 따른 시장의 우려를 의식한 듯 “공동부유는 획일적인 균등주의가 아니다. 경제 발전 능력을 강화해야만 공평함을 추구하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중국몽을 향한 시 주석의 공동부유가 시험대에 올랐다.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각종 규제를 쏟아내며 추진하려는 공동부유는 성공할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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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단풍과 나들이<지평선> 단풍과 나들이 송태윤(논설위원, 문학박사) 가을이 깊어지면서 전국의 산이 형형색색으로 단장을 한다. 이때엔 주말을 맞아 가을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도 부쩍 는다. 그런데 나뭇잎은 왜 이맘때가 되면 예쁘게 물들까. 가을여행에 흥미로운 단풍에 대하여 살펴보자. 단풍(丹楓)은 기후의 변화로 식물의 녹색 잎이 붉은 색이나 노란색, 갈색 등으로 물드는 현상을 말한다. 나뭇잎은 최저기온이 5℃ 이하로 떨어지면 물들기 시작한다. 나뭇잎에 있는 녹색 엽록소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파괴된다. 이때 엽록소에 가려져 있던 붉은색의 안토시아닌, 노란색의 크산토필 등의 색소가 드러나는 것이 단풍인 것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녹색 잎과 줄기를 가지고 있다. 식물이 녹색을 띠는 건 식물 세포 안에 초록색 색소인 ‘엽록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엽록소 덕분에 식물은 동물과 달리 태양의 빛에너지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와 물을 이용해 포도당을 만들어 그 과정에서 산소를 방출할 수 있다. 이것을 식물의 광합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식물의 색소에는 초록색 엽록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식물이 활발하게 성장하는 여름에는 엽록소가 많지만, 노랗고 주황빛 계열의 색을 내는 카로틴과 크산토필, 붉은 빛을 띠는 안토시아닌 등 다른 색깔의 보조 색소도 함께 갖고 있다. 이런 보조 색소 덕분에 식물은 다양한 파장의 햇빛을 흡수할 수 있다. 한여름에 식물은 광합성으로 만든 포도당과 수분이 줄기와 잎 사이를 활발하게 이동한다. 하지만 밤 기온이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가을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먼저 식물은 겨울나기에 대비하기 위해 잎과 줄기를 연결하는 부위의 세포를 단단하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단한 칸막이 같은 세포층을 ‘떨켜층’이라고 부른다. 떨켜층이 만들어지면 식물 뿌리가 흡수한 물이 나뭇잎으로 공급되지 못해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잎은 산성화되고 수분이 부족해지면서 엽록소가 차츰 빛을 잃기 시작하여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게 된다. 또 붉은색의 안토시아닌과 노란색의 카로틴이 혼합되면 화려한 주홍색이 되는데 이것은 단풍나무 종류에서 관찰할 수 있다. 참나무류와 너도밤나무에 있어서는 탄닌 성분 때문에 황갈색을 나타낸다. 특히 단풍은 일교차가 심할수록 더 색이 선명하다고 한다. 또 평지보다는 산, 강수량이 많은 곳 보다는 적은 곳, 음지보다는 양지바른 곳에서 단풍은 아름답게 물든다. 가을에 비가 적게 와 가뭄이 이어지고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 엽록소의 파괴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색깔이 선명해진다. 지나치게 건조한 것은 아름다운 단풍을 보는 데 방해 요소다. 가뭄 등으로 날씨가 너무 건조하면 단풍이 들기 전 잎이 타버리기 때문이다. 기상청은 단풍이 산 전체의 20% 가량을 차지하면 ‘첫 단풍’, 80% 정도면 ‘절정기’로 분류한다. 한국에서 가을에 나무 잎이 붉게 물드는 나무는 단풍나무 외에도 당단풍, 복자기, 옻나무과의 붉나무, 장미과의 마가목, 벚나무, 팥배나무 등이다. 하지만 노랗게 물드는 나무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그리고 은행나무이다. 콩과 나무와 뽕나무과 나무, 목련과 나무들도 노란색으로 물든다. 대륙마다 단풍의 색이 다른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나 북아메리카 사람들에게 가을 단풍은 빨갛고 노란 색을 떠올리게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단풍은 노란색일 뿐이다. 이에 대해 유럽에서 빙하기에 곤충들이 많이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 과학자들도 있었다. 단풍의 붉은색을 내는 안토시아닌은 곤충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는데 빙하기에 살아남은 유럽의 나무들은 구태여 곤충과 싸우기 위해 안토시아닌을 생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국립수목원에 따르면 올해는 설악산은 10월 3일, 소백산은 10월 10일, 지리산은 10월 18일, 내장산은 27일을 시작으로 전국의 산이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뒤덮일 예정이라고 한다. 이는 평년보다 다소 느린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여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올해뿐만 아니라 매년 단풍철은 늦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집에만 있었기에 심신이 피로하고 마음이 해이되었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산과 들로 나가 피로를 풀고 심신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풍을 대하는 것도 계곡의 물소리를 보고 듣는 것도 생활의 활력소이다.